패권의 함정과 한국의 생존전략 - 이병훈 더불어민주당 호남발전특별위원회 수석부위원장, 전 국회의원
2025년 10월 17일(금) 00:00
역사는 패권국의 쇠퇴가 외부 위협보다는 내부의 구조적 모순에서 시작된다는 교훈을 남긴 바 있다. 20세기 초 영국이 자유무역의 원칙을 버리고 보호관세와 제국 특혜 체제로 후퇴했던 과정은 오늘날 미국의 모습과 놀라울 만큼 닮아있다. 영국은 1932년 수입 관세법을 통해 대부분 수입품에 10% 기본 관세를 부과하고, 오타와 회담에서 영연방 내부에는 특혜를, 외부에는 장벽을 세우는 이중 구조를 제도화했다. 단기적 산업 보호 효과는 있었지만, 보호막 안의 산업들이 경쟁력을 잃고 혁신 능력을 상실하면서 장기 침체로 이어졌고, 결국 세계 경제 질서의 주도권을 미국에 내주게 되었다.

현재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은 이러한 역사적 패턴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2025년 4월 5일부터 전 품목에 10% 일괄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하여, 철강·알루미늄에 최대 50%, 중장비 트럭에 25%, 브랜드 의약품에 100% 관세를 예고하는 등 관세의 범위와 강도를 확대하고 있다.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는 동맹국들을 노골적으로 등급화하는 체계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파이브 아이즈’라 불리는 1등급 국가와는 달리 한국과 일본은 2등급으로 묶여 정보 접근이 제한되고 까다로운 투자 심사를 거쳐야 하는 불리한 조건에 놓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한국의 미국내 현금투자 3,500억 달러를 강요한 것뿐만 아니라 미국내 현대자동차 공장 건설과 관련 근로자 300여 명 이상을 억류하고 강제 귀국시킨 것이다. 또한 전문직 취업 비자를 100달러에서 10만 달러 (1인당 1억 4천만원)로 인상 시키는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마초 행각을 벌이고 있다.

한국의 생존전략

미국이 한국을 2등급으로 대우하는 모순된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더욱 부각되고 있다. 반도체 분야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을 점유하고 있으며, 특히 SK하이닉스는 2025년 1분기 글로벌 DRAM 시장에서 36%의 점유율로 1위에 올랐다. HBM(고대역폭 메모리) 시장에서는 SK하이닉스가 70% 이상을 점유하며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다.

조선업에서도 한국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2025년 3월 한국은 글로벌 조선 수주에서 55%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중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고, LNG 운반선 시장에서는 93%의 압도적 시장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해군이 직접 한국 조선소에 차세대 전함 건조를 맡기고 있는 상황은 미국의 한국 의존도가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준다.

방산 분야에서도 한국은 세계 5위의 국방과학기술 수준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드러난 NATO의 방산 생산 능력 부족 상황에서 한국의 신속하고 대규모 생산 능력이 주목받고 있다.

미국 동맹국 서열화와 차별적 대우에 맞서 한국이 취해야 할 전략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술 주권의 확립이다. 반도체와 조선업에서 확보한 글로벌경쟁력을 바탕으로 핵심 기술 분야에서 대체 불가능한 위치를 공고히 해야 한다. 특히 AI 반도체와 첨단 메모리 기술에서의 우위를 지속적으로 확대하여 미국도 무시할 수 없는 기술 파트너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둘째, 다변화된 협력 네트워크의 구축이다. 미국 일변도의 외교에서 벗어나 유럽, 인도, 동남아시아 등과의 다층적 파트너십을 강화해야 한다.

셋째, 경제 안보의 강화이다. 미국의 관세 압박과 달러 패권 변화에 대비해 통화 스와프 확대, 원화 국제화, 대안 결제 시스템 구축 등을 추진해야 한다. 또한 핵심 광물과 에너지 공급망의 다변화를 통해 경제적 자립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

넷째, 연성권력의 확대이다. K-컬처의 글로벌 영향력을 바탕으로 한국의 가치와 비전을 세계에 확산시키고,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패권국의 흥망성쇠는 주기적으로 반복되지만, 실력과 가치를 갖춘 국가는 어떤 질서 속에서도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다. 한국이 추구해야 할 것은 특정 패권국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 변화하는 국제질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립적 국가 역량의 구축이다. 이것이야말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는 가장 현명한 생존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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