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있는 질서보다 생명있는 무질서 - 황성호 신부·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2025년 09월 26일(금) 00:20
우리 사회는 정교하게 체계화되어 있다. 행정, 법률, 의료, 교육, 경제 모든 분야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세밀한 규정과 절차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본래 이 체계와 질서는 사람을 살리고 편안함과 풍요로움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체계를 위한 톱니바퀴에 부품처럼 사람이 존재하는 듯 한 주객전도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장면들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가 법과 규정이다. 법은 정의를 세우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때로는 그 법이 사람을 옥죄는 족쇄가 된다. 몇 해 전, 광주에서 한 노인이 새벽길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는데 구급차가 가장 가까운 개인 병원이 아닌 지정된 응급센터로 옮겨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20분 이상을 더 달려야 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땐, 그 노인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 사람을 살리려고 만들어진 규정, 규정은 지켜졌지만 한 사람의 생명은 잃어버렸다.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생명이 위급한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는데 진료비 결제나 신분 확인이 먼저 요구되는 현실이다. 규정과 절차가 있고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이해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의료현장에서 의료진의 노고와 헌신에 매번 감사한다.

그러나 미등록 이주민들을 만나고 도움을 주는 필자로서는 사뭇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자주 벌어진다. “먼저 치료부터 합시다”라는 말은 병원의 수익 구조와 보험 규정에 막혀 좋은 마음과 생명을 살리는 마음까지도 가로막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규정과 절차가 생명보다 앞서는 순간, 그 질서는 이미 숨을 잃은 ‘죽어있는 질서’가 된 것 같다. 죽음의 질서가 과연 생명을 살릴 수 있을까?

가톨릭 신앙은 물론 모든 종교는 언제나 생명을 우선한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기존의 체계와 질서를 유연하게 적용하고 필요하다면 과감히 뛰어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었다고 비난받을 때 다윗과 그 일행이 사제에게만 허락된 제사빵을 먹었던 일을 상기시키셨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율법보다 앞서며 생명이야말로 하느님법의 핵심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질서를 거슬렀지만 생명 있는 무질서였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식별이 필요하다. 모두가 2021년 광주 학동 재개발 철거 건물 붕괴참사를 기억할 것이다. 공사비 절감과 일정 단축을 위해 안전 규정을 무시한 결과였고 시내버스를 타고 기다리던 시민 9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현장은 안전관리자도, 제대로 된 통제선도 없었다. ‘효율’과 ‘이익’이라는 이름 아래 소중한 생명은 너무나 쉽게 무너져버렸다. 이런 불의와 폭력에 대해 종교계와 시민사회, 모든 양심 있는 사람들이 분명하게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침묵은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동조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며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죽어있는 질서를 지키기 위해 사람을 무시하고 착취하고 억압하는 행동은 결국 그 해악이 ‘나’에게 돌아온다. 반대로, 생명 있는 무질서는 다소 복잡하고 어수선해 보여도 사람을 위하고 생명을 보호하며 사랑과 희생으로 협력하는 행동으로 반드시 그 선한 영향이 ‘나’에게로 돌아온다.

죽어있는 질서와 생명 있는 무질서를 구별하기 위한 세 가지를 제시해본다. 먼저, 시간의식이다. 오래된 규정이 오늘의 현실에 맞는지, 그 목적을 여전히 살리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다음으로 자기 성찰이다. 내가 지키는 질서가 정말 사람을 살리는지, 아니면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울타리로만 작동하는지 묻는 용기다. 마지막으로 변화 수용인데 질서가 본래의 목적을 잃었다면 기꺼이 바꾸거나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한다.

가톨릭 신앙에서 가르치는 하느님 나라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 나라는 죽어있는 질서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와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생명의 나라다. 우리가 죽어있는 질서, 시대의 질서를 뛰어넘어 비록 무질서 속에서도 생명을 우선 선택할 때 그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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