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호의 키워드로 읽는광주·전남 미술사] 자유의지와 시대의 상처 예술로 승화…추상미술 선도
[추상·비구상 회화의 개척-강용운·양수아]
■ 강용운
1921년 화순 출신 日 유학파 자유주의자
떠오르는 이미지·화면효과 우선해 재해석
행위 흔적만으로 화폭 채우는 액션페인팅
한세대 앞서 비정형 추상회화 정립
한국미술계 전위미술운동 주된 양식 발전
2025년 09월 23일(화) 21:05
강용운 ‘부활’ 1957, 목판에 유채, 33.3x24.2cm
남도 현대미술에서 비구상은 물론 추상회화도 줄곧 비주류로 밀려나 있었다. 전통 한국화단이나 서양화단이나 워낙 자연 친화적 정서, 자연주의가 대세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지역 신안 출신인 김환기(1913~1974)가 한국 근·현대기를 대표하는 추상화가다. 하지만 그는 중학교 때 일본 유학을 떠난 이후 서울, 파리, 미국 등 줄곧 타지로 나가 살았고, 고향과는 별다른 미술 활동에서 관계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연고작가 이외의 의미는 없다. 따라서 사실상 남도화단에서 추상미술의 개척자는 1940년대 초부터의 강용운이고, 1940년대 후반에 합류한 양수아가 든든한 예술동지가 되어 주었다.

◇자유로운 예술혼의 비정형 회화-강용운의 추상 비구상 세계

호남화단의 추상미술 선도자인 강용운(姜龍雲, 1921~2006)은 화순 출생으로 서울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제국미술학교(후의 무사시노미술학교)에서 양화를 익혔다. 가와구찌 가가이(天口軌外) 교수 등의 신감각 조형세계 영향도 있었지만 천성적으로 자유주의자였던 그는 유학시절부터 외부 대상의 묘사가 아닌 주관적 상상력과 심상을 표현하는 작업들을 남겼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학교를 중퇴하고 돌아와 1947년 전남여고를 거쳐 2년 뒤 광주사범학교로, 1955년부터는 사범대학에서 교단에 서며 추상회화 작품을 이어갔다. 해방 후 서구문화가 급속히 유입되던 시기에 미국공보원에 드나들며 서양 현대미술 소개자료들을 참고하기도 하면서, 1950년 한국전쟁 직전에 첫 추상화 작품전을 미국공보원에서 열었고, 줄곧 비정형추상(앵포르멜)에 심취한 회화세계를 탐닉했다.

그는 오지호의 철저히 자연 본성을 우선한 ‘구상회화론’에 맞서 지상논쟁 ‘현대회화론-그 사조의 의미와 금일의 예술’(전남일보. 1961.2.11∼3.1, 총 21회 연재)을 펴기도 했다. “총천연색 사진, 입체사진까지 있는 시대에 사물의 외관을 충실하게 기록하는 구상은 존재할 수가 없다. (중략) 자연의 모방인 아카데미즘은 태양이나 전등 앞의 호롱불처럼 무가치한 것 (중략) 이 세계와 우주의 모든 것에서 에너지를 발견하여 모든 인간 행위의 제 활동으로 얻어낸 에센스를 종합하여 새로운 세계,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여야 한다.”며 “앵포르멜은 현실의 벽을 무너뜨리는 행위이며, 인간 역사, 예술의 역사는 반전통적이며 본질은 항상 부정적인 것이다. (중략) 가치 있는 예술은 생명의 구토이다”라고 주장했다.

양수아 ‘작품(戰禍)’, 1972, 종이에 유채, 30x39.5cm
그의 초기 작품인 ‘눈이 있는 정물’(1943)은 과반 위 과일과 눈, 화분, 꽃 등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형태들이되, 굵고 거친 윤곽선과 강렬한 원색 대비로 암시적 형상을 구성한 반추상화다. 이듬해 ‘도시풍경’(1944)도 언뜻언뜻 암시적 건물의 형태가 비치기는 하지만 외관 풍경의 묘사가 아닌 도시의 이미지를 자유롭게 해체시켜 그려낸 수채화다. 소재를 염두에 두되 그 사실적 묘사에 매이지 않고 떠오르는 이미지와 화면효과를 우선해서 주관적으로 재해석해내는 것이다.

이 같은 초기의 반추상 양식은 1950년대 이후 대상으로부터 완전한 탈피와 함께 안료와 붓질의 흔적, 행위성만을 남기게 된다. 1950년 작인 ‘축하’는 물감을 비비고 뿌린 행위성이 화면을 채우고 있고, 1957년의 ‘부활’에서는 베니어합판 위에 과감하게 그은 굵고 거친 붓질만을 중첩시킨 비정형 추상표현주의 형식을 보인다. 즉흥적 에너지와 표현하는 행위의 흔적만으로 화폭을 채우는 액션페인팅의 저돌성을 뿜어낸 것이다.

강용운이 1940년대부터 탐구해온 이른바 ‘앵포르멜(비정형추상)’ 회화형식은 1957년부터 한국미술계를 들불처럼 휩쓸게 된 전후세대 전위미술운동의 주된 행동양식이 됐다. 기성화단의 권위 의식과 관념적 아카데미즘에 반발하는 청년세대의 저항과 일탈의 욕구를 토해내는 최적의 방편이 된 것이다. 이런 시류에 맞춰 조선일보사는 ‘현대작가초대전’을 통해 이들 신흥 청년세대 열기를 지원하였고, 여기에 강용운도 초대되어 제자뻘 후배들의 집단적 저항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저돌적 미술운동이 점차 시대문화의 신흥세력으로 부상하게 되는데, 선도자였지만 세대가 다르고 지방작가라 변방의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었던 강용운은 그런 세간의 관심과 상관없이 평생을 자유로운 예술혼을 쏟아내는 비정형 추상회화로 일관했다.

양수아 ‘작품’ 1971, 한지에 수채, 유채, 62x62cm
◇시대와 삶의 상처 고뇌 절규, 양수아의 해체된 화폭

지역 화단의 주류문화와는 다른 길을 고집하면서 외롭고 불안정하기만 한 강용운에게 단짝 예술동지가 되어 함께 호남화단의 추상미술을 함께 일군 이가 양수아(梁秀雅, 1920~1972)다. 같은 비정형 추상 계열로 표현형식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작품 성향은 서로 다른 내적 동기를 깔고 있었다. 강용운이 무엇에고 얽매이고 싶지 않은 낙천적 순수 자유주의자였다면, 양수아는 그 또한 자유를 갈망하되 시대와 인생사의 깊은 상처와 고뇌가 저항과 절규의 일탈 욕구를 화폭에 분출시킨 것이었다.

강용운보다 1살 위인 양수아는 보성 출신으로 보통학교 때 일본에 건너가 소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1942년 동경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 양화과를 졸업했다. 태평양전쟁기 징집 때문에 대학 진학을 못하고 만주로 피신했다가 거기서 안동신문 기자생활을 하던 중 해방을 맞아 목포로 돌아왔다. 목포사범학교와 문태중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하며 1948년 광주 미국공보원에서 강용운과 2인전에 이어 개인전을 여는 등 호남 서양화단 초창기에 추상미술 개척에 앞장섰다.

그러나 제주4·3항쟁에 연루된 동생이 한국전쟁 직후에 처형당하고, 그도 인민군 부역자 처벌을 피해 남부군으로 입산한 뒤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의 고통을 겪는 동안 내면에 생채기가 덧쌓여만 갔다. 게다가 사회복귀 후에 계속된 공안의 감시와 압박은 그를 심적으로 더 억압했고, 조울증으로 희비를 오가는 속에서 오직 화폭을 분출구 삼아 무언의 응어리를 쏟아냈다.

지난 2012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강용운, 나를 춤추다’전 전경. <조인호 제공>
양수아가 호남화단의 초기 추상회화 개척자라고들 하고, 1948년 개인전 때도 추상화를 발표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험난한 인생사 때문에 대부분의 자료들이 없어져 그 실체를 확인하기 어렵다. 1940년대 말로 추정하는 종이에 크레용으로 그린 드로잉들로 겨우 추상의 이른 흔적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이 가운데는 ‘그리움’ ‘질투’ ‘불만’ ‘차별’ 등의 제목과 함께 암시적 형상을 그린 것도 있고, 아예 형상을 무시한 채 낙서 같은 선들을 마구 그어댄 형식도 있다. 목포와 광주에서 한창 활동하던 1950년대 작품들은 그가 ‘위조지폐’라며 자학하던 풍경이나 인물, 정물 같은 구상화들이 대부분이어서 걸머진 삶의 무게를 들여다보게 한다.

양수아의 비정형의 추상회화들은 거의 제작 연도가 분명치 않다. 목포에서 광주사범학교로 옮긴 1956년 이후나, 조선일보사 주최 ‘현대작가초대전’에 참여하는 1950년대 말부터 앵포르멜 형식의 비중이 높아졌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연도가 분명한 가장 빠른 예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작품’(1962)이다. 화면을 지배하는 검고 거친 곡선이 두텁게 휘돌아져 흑백의 강렬한 대비감을 만들어낸다. 전남대병원 소장의 ‘잉태’(1969)는 원과 사각의 구성에 뭉개진 비형상의 붓자욱들이 어우러져 꿈틀거리는 생명감을 느끼게 한다. 또한 ‘상처 입은 자화상’(1970)은 빠르게 휘두르고 비벼댄 거친 붓질들의 중첩으로 처절하게 짓이겨진 고통의 내면 초상을 보여준다. 1972년 작인 ‘전화(戰禍)’는 두텁게 덧쌓고 깎고 문지른 광폭한 회오리의 화폭으로써 그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지기 직전까지도 가슴 속 깊이 패여 아물지 않고 있던 전쟁의 참화와 트라우마의 고통을 토해 놓았다.

강용운과 양수아, 양수아와 동갑으로 가와바타화학교 동문인 배동신(1920~2008), 세 작가는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호남화단의 이단아이자 예술의 자유와 정신성을 작품과 발언으로 외쳤던 시대문화의 선도자들이었다. 강용운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서울 전후세대 앵포르멜 전위미술운동보다 한세대 앞서 비정형 추상회화를 일궜고, 양수아 또한 강용운과는 결이 다른 고통의 내면 초상들로 질곡의 현대사를 표출해냈다. 이들의 앞선 활동은 광주사범학교와 사범대학의 제자인 ‘현대미술 에포크회’ 주역들인 최종섭, 장지환, 우제길, 최재창 등에게 이어져 구상회화 대세인 호남화단에서 현대미술의 회화세계와 예술정신을 더 넓게 확장시켜냈다.

조 인 호 전문가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한국미술사 전공.

▲ (재)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정책기획실장 역임

▲‘남도미술의 숨결’, ‘광주 현대미술의 현장’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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