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탄 속에서도 기록은 멈추지 않았다 - 조수민 조선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4년
2025년 09월 23일(화) 00:20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군이 계속 기자를 살해한다면, 머지않아 당신에게 뉴스를 전할 이가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다.”

국경없는기자회(RSF)가 던진 이 한 문장이 며칠째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문장인데 왜 하필 지금 이렇게 가슴에 박혀 있을까.

사실 나도 그랬다. 가자지구 얘기만 나오면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난달엔 팔레스타인 기자가 직접 쓴 굶주림 체험기를 우연히 읽다가 너무 괴로워서 중간에 탭을 꺼버렸다. 무력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RSF 캠페인을 제대로 들여다보면서 처음으로 정면승부를 걸어보기로 했다.

숫자가 말해주는 진실은 잔혹했다. 2023년 10월 7일 이후 가자지구에서 죽은 사람이 6만 3557명. 그중 절반이 여성과 아이들이다. 굶주리는 사람은 50만 명,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이 348명인데 그중 127명이 아동이다. 5살 미만 아이 중에 급성 영양실조 상태인 경우가 32만 명이나 된다.

이 숫자들을 누가 세상에 알렸을까. 바로 현지 기자들이다. 폭탄이 떨어지는 중에도 카메라 메고 뛰어다닌 사람들 말이다. 그런데 그 기자들이 지난 2년간 247명이나 죽었다.

아나스 알샤리프라는 29살 기자가 있었다. 퓰리처상까지 받은 실력자였는데 생전에 이런 유서를 남겼다고 한다.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이스라엘이 저를 살해하고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뜻입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왜곡이나 위조 없이 전하는 데 한 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가자를 잊지 말아 주세요.”

이런 얘기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 이게 남의 일일까 싶었다.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잖나. 5·18 때 외신기자들이 아니었으면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세상이 알 수 있었을까. 당시 국내 언론은 폭도니 난동이니 하면서 진실을 가렸다. 시민들이 직접 찍은 사진과 증언, 몇몇 용기 있는 기자들의 취재가 없었다면 지금도 5·18은 묻혀 있을 것이다.

그때와 지금이 뭐가 다른가. 권력이 진실을 감추려 할 때 그걸 파헤치고 세상에 알리는 사람들이 언론인이다. 그런데 그 언론인들을 죽여서 입을 막아버리면? 진실도 함께 사라진다.

생각해 보니 무서운 일이다. 지금 가자의 기자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나. 정부 발표문이나 일방적인 보도자료에만 의존해야 하는 건가. 그러면 진실은 점점 희미해지고 결국 잊혀진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더 큰 비극이 벌어져도 우리는 눈치조차 챌 수 없게 된다.

언론인을 죽이는 건 단순히 사람 한 명을 없애는 게 아니다. 진실 자체를 말살하는 행위다. 알 권리를 빼앗는 것이고 결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기자가 사라지면 가짜뉴스만 판친다. SNS에 떠도는 말도 안 되는 루머들이 진실인 양 포장되고 정치인들의 일방적인 주장만 난무하게 된다. 팩트 체크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하는 언론이 없으면 우리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능력을 잃는다.

가자의 기자들이 목숨 걸고 전하려 했던 건 뭘까.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 생명의 소중함, 그리고 세상이 외면하려는 진실이다. 그들이 찍은 사진 한 장, 쓴 기사 한 줄이 역사의 증언이 되고 훗날 진실을 밝히는 결정적 근거가 된다. 알샤리프 기자의 유서에서 “가자를 잊지 말라”고 했지만 사실 더 중요한 건 이런 언론인들을 잊지 않는 것 아닐까. 그들이 왜 목숨을 걸고 펜을 들었는지, 왜 카메라를 놓지 않았는지 기억해야 한다.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관심은 가질 수 있다. 외면하지 말고 들여다보는 것,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지 않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진실을 전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야 한다.

총탄이 빗발치는 곳에서도 기록을 멈추지 않았던 가자의 언론인들. 나는 그들에게서 진짜 기자가 무엇인지 배웠다. 언젠가 기자가 된다면 아니 기자가 되지 않더라도 그들처럼 진실 앞에서 용기를 잃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외면하고 싶은 현실일수록 더 깊이 들여다보고, 세상이 잊으려 하는 이야기일수록 더 오래 기억하는 그런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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