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범의 ‘극장 없이는 못살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여성 단원
2025년 09월 18일(목) 00:00
금년에도 세계 최고 실력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빈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11월 19일과 2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한다. 빈필은 실력과 화사한 사운드도 유명하지만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단체인 것으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대표적인 것이 1842년 창단부터 1997년까지 150년이 넘게 단원들이 전원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점이다.

그런데 1997년 빈필이 미국투어를 가게 되면서 여성 단체들이 크게 반발하고 오스트리아 정부가 재정을 끊겠다고 압력을 넣자 빈필은 드디어 어쩔 수 없이 여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빈필의 첫 단원이 된 여성은 이미 20년 간 빈필에서 연주를 했지만 프로그램북에 이름조차 써있지 않았던 하피스트 안나 릴케스였다.

1997년부터 빈필의 여성 단원 오디션이 허락되었지만 빈필은 차일피일 여성 단원을 뽑지 않고 탈락시키고 있었다. 첫 여성 단원으로 정식 채용된 연주자는 27세의 비올라 주자 우어줄라 플라이칭어였다. 빈필은 내친 김에 악장직에도 여성을 뽑게 된다. 주인공은 불가리아 출신 알베나 다나일로바. 그는 2008년 빈국립오페라 극장의 악장 자리에 합격한 후 3년 간의 수습기간 동안 연주 일정을 소화하고 심사를 최종 통과해 드디어 빈필의 첫 여성 악장에 오르게 됐고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현재 빈필의 여성 단원수는 점점 늘어나 총 145명 중 24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여성 단원들을 모두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빈필 단원들은 교향악단 공연 뿐만 아니라 빈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로 연주를 하고 있기 때문에 오페라에 참여하는 단원들도 많아서이다.

이제 빈필 측은 “우리는 성별에 관계없이 최고 실력의 음악가들을 뽑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편 세계 오케스트라의 톱인 베를린필은 빈필보다 훨씬 일찍 여성 단원을 뽑는 문제로 국제적인 이슈가 됐다. 1982년 상임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 의해 클라리네티스트 자비네 마이어가 첫 여성 단원으로 지목되자 기존 단원들은 오케스트라 경험이 부족하고 목관 단원들과 잘 섞일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격렬히 반대했다. 결국 단원 투표에 의해 마이어는 수석 단원으로 뽑히는 것이 좌절되었다.

카라얀은 강력하게 자비네 마이어를 원했고 마이어를 뽑지 않을 경우 베를린필 단원들이 짭짤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녹음 작업 지휘를 보이콧하겠다는 선언도 했다. 하지만 결국 여성 단원을 뽑고 싶어하지 않는 단원들에 의해 자비네 마이어는 1년 간의 수습 계약만 하게 되었고 마이어는 그 길로 베를린필을 그만두고 최고의 솔리스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자비네 마이어는 카라얀의 후임으로 베를린필을 지휘하다가 사임한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이끄는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클라리넷 수석으로 참여해 빼어난 기량을 전세계인들에게 들려준 바 있다. 당시 베를린필 단원들의 편협한 마음은 자비네 마이어라는 불세출의 대어 연주자를 놓치는 결과를 빚었던 것이다.

미국으로 눈을 돌려보면 1942년에 창단한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경우에는 1966년에 최초의 여성 상임 단원들이 입단하게 된다. 더블베이스 주자인 오린 오브라이언이다. 31세의 나이에 뉴욕필에 입단한 오브라이언은 2021년 은퇴할 때까지 무려 55년 동안 뉴욕필에서 활동했으며 이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오케스트라의 유일한 여자’(The Only Girl in the Orchestra)로 제작되어 2025년 오스카상 단편 다큐멘터리 부문을 수상했다.

우리나라는 오히려 서양의 유명 교향악단들보다 빨리 여성 단원들을 받아들였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오케스트라 단원을 모집했던 민간 오케스트라 고려교향악단의 경우 여성단원을 모집했다는 공고가 있으며 이 오케스트라가 1950년에 창단한 서울시향의 전신이다. 창단 초기부터 여성 단원들이 활동해왔으나 당시 기록 부족으로 첫 여성 단원을 특정하기는 어려운 상태다.

서울시향은 2005년 세종문화회관 전속단체에서 벗어나 재단법인으로 독립했는데 이때 새롭게 오디션을 통해 단원들을 뽑았고 대거 여성 단원들이 채용되어 현재 단원중 남성 31명, 여성 59명으로 여성 단원의 수가 거의 두배 정도 더 많다. KBS교향악단이나 부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 마찬가지여서 음대에 진학하는 여성의 숫자가 훨씬 더 많은 것에 기인하고 있는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다.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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