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휴가 - 이보람 예향부 부장
2025년 07월 16일(수) 00:20
얼마 전 우연찮은 기회에 책 한 권을 받아들었다. ‘하루 한 장 삶에 새기는 철학의 지혜’. 철학이라는 단어 앞에 괜히 주눅이 들어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펼쳐 들었는데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인생은 짧지 않다. 우리가 낭비하고 있을 뿐이다”(세네카), “습관은 우리의 두 번째 본성이다. 오늘의 반복이 내일의 나를 만든다”(존 듀이). 철학자들의 짧은 문장 속에는 사유와 지혜가 담겨 있었고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조언을 주기도 했다. 45명 철학자들의 글 끝에는 문장을 곱씹으며 따라 써볼 수 있도록 ‘한 줄 필사’가 마련돼 있다. 한 줄을 베끼다가 나의 하루를 돌아보게 되고 내일의 다짐을 적게 되는 그런 공간이었다.

한때 ‘필사 열풍’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유명 작가의 문장을 따라 쓰며 마음을 다독이고 SNS에 공유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금은 조금 잠잠해졌지만 필사의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빠르게 흐르는 시대 속에서 나를 붙잡아 주는 느린 행위. 펜으로 글자를 옮겨 적는 단순한 행위 속에 마음을 비우고 채우는 시간이 깃들어 있다.

즐겨 보던 TV 예능 ‘지구오락실’에서 출연자들이 벌칙으로 ‘디지털 디톡스’를 받는 장면이 떠오른다. 휴대폰 없이 하루를 보내며 안절부절못하던 그들의 모습이 한편으론 꽤나 공감됐다. 우리도 스스로 휴대폰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다. 쉴 새 없이 알림이 울리고 눈보다 손이 먼저 화면을 켜는 시대에 ‘디지털을 잠시 멈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필사는 그런 면에서 아날로그식 디지털 디톡스다.

휴가를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된다. 그늘진 창가나 한적한 카페, 바다가 보이는 방 한구석이나 조용한 도서관 구석 자리. 그런 곳이면 된다. 내 안의 소음이 조금은 가라앉을 수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지, 책 한 권과 펜 하나만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지는 시간을 누구나 누릴 수 있다. 여름의 느슨한 틈새에 어울리는 가장 조용한 휴식이자 나를 위한 작은 위로다.

이번 휴가엔 휴대폰을 잠시 내려놓고 책과 펜을 들기로 했다. 어디로 떠나지 않아도, 문장 속에서 충분히 쉬어갈 수 있으니까.

/이보람 예향부 부장 bora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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