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예향] Jindo Culture 지역민 애환 담긴 ‘진도아리랑’
2025년 07월 15일(화) 14:00
의신면 사천리 첨찰산 남쪽 기슭에 세워진 ‘珍島(진도)아리랑碑(비)’. <최현배 기자>
Jindo Culture

한 가락 부르면 가슴속 먹구름 걷히네 ‘진도아리랑’

“아리 아리랑 서리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 응~ 응~ 아라리가 났네~”

울돌목 바다 위 진도대교를 넘어서니 어디에선가 아리랑 가락이 들려오는 듯하다. 울돌목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이 벌어진 역사의 격전지다. 좁은 해협, 거센 조류, 수십 배의 열세 속에서도 백성들과 함께 싸워 이긴 곳. 이곳에서 부른 진도아리랑은 이별을 삼키고 고단함을 꾹꾹 누른 사람들의 하소연이었다. 울돌목의 회오리처럼 슬픔이 돌고 돌아 결국은 다시 살아내기 위한 기운으로 돌아온 게 아닐까.

진도는 아리랑의 고장이다. 아리랑은 우리나라 대표 민요이자 한국 문화를 상징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현재 전승되는 아리랑은 60여 종 3600여 곡에 이른다. 그중 진도아리랑과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이 우리나라 ‘3대 아리랑’으로 불린다.

진도아리랑체험관 내 역사아리랑 전시실. <최현배 기자>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진도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이라면 한두 번쯤은 진도아리랑을 듣게 된다. 어디를 가나 주민들이 흥얼거리기 때문이다. ‘진도에는 소리꾼만 살고 있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예전에는 밭에서 김을 매던 아낙들도 노래 한 자락 정도는 구성지게 뽑아내기도 했다.

진도아리랑의 노랫말에는 노래를 불러온 사람들의 삶이 투영돼 있다. 논밭에서 일할 때,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때, 마을 잔치에서도 부르며 사람들의 삶의 리듬에 장단을 맞췄다. 다소 빠른 템포로 흥이 나는듯하지만 노랫말 하나하나에는 밥벌이의 고단함, 이별의 아픔, 자식에 대한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진도 사람들의 한과 애환이 담긴 노래라지만 진도아리랑의 기원 설화는 대체적으로 사랑 이야기인 듯하다. ‘진도향토문화백과’에 따르면 두 가지 설화가 전해온다.

옛날 지산면 관마리 목장에 설 감목관이 있었는데 그의 딸 설이향이 원님의 아들 소영과 사랑하는 사이였다. 50여 리 떨어진 거리였지만 중간 지점인 임회면 선항리 마을 뒷산 굴재에서 만나곤 했다. 어느 날 약속한 날에 소영 공자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그 후로 만날 수가 없었다. 이듬해 소영 공자가 다른 처녀와 결혼하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설 낭자는 비수로 머리를 잘라 중이 되고 말았다. 두 남녀가 굴재에서 만나는 것을 보고 지나던 초군들이 ‘아애랑 설이랑 아라리가 났네’하고 노래하던 것이 진도아리랑이 됐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설화는 진도 한 당골집에 당골이 되는 것을 비관한 총각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사랑하는 처녀와 혼약만 남긴 채 진도를 떠나 육지 어느 고을에서 머슴을 살았다. 주인집 예쁜 처녀가 머슴에게 반해 서로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다 결국 부모에게 들켜 둘은 그 길로 문경새재를 넘어 진도에 들어와 살게 됐다. 진도에서 총각을 기다리던 처녀는 총각이 양가집 규수를 데리고 온 것을 알게 돼 서럽게 울면서 노래했는데 그것이 진도아리랑이었다.

다만 이 이야기들은 설화일 뿐 기록에 남겨진 진도아리랑의 기원은 1900년도 초 대금의 명인인 임회면 삼막리 출신 박종기 선생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진도아리랑은 대금, 해금, 가야금 등 국악기로도 연주된다. 단아하고 풍부한 음색을 가진 악기들이 신명 나는 진도아리랑 장단과 만나면서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울림을 흥으로 승화시켜 듣는 이들에게 감동을 전해준다.

임회면 오봉산 귀성마을 ‘진도아리랑마을관광지’에 조성돼 있는 진도아리랑체험관. <최현배 기자>
임회면에 가면 아리랑마을 관광지가 있다. 세계 속의 아리랑과 팔도 아리랑을 배우고 악기를 두드리며 아리랑 체험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장마철이라 오봉산 아래 깊숙이 구름이 내려앉아 있다. 마을 이름 때문인지 날씨 때문인지 왠지 모를 스산함이 전해온다. ‘아리랑마을관광지’라 불리고 있는 이곳 마을의 본래 이름은 귀성마을이다. 여귀산 남쪽 자락으로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는 오봉산 아래 경관이 아름다운 어촌이다.

오봉산 정상은 왜적이 쳐들어왔을 때 봉화불을 피워 알렸던 곳이다. 불 피우던 터가 지금도 남아있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돌로 도리장(포 설치용 구조물)을 쌓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오봉산과 귀성마을의 전설을 떠올리며 진도아리랑마을 관광지에 들어선다. 지난 2004년 여귀산 기슭에 국립남도국악원이 자리한 이후 진도군은 2011년 국악원이 내려다 보이는 귀성마을 언덕에 아리랑마을 관광지를 조성했다. 아리랑체험관과 그 옆으로 한옥으로 지어진 홍주촌, 장미공원, 쌈지공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진도군 임회면에 위치한 ‘아리랑마을’ 안내 표지판. <최현배 기자>
진도아리랑체험관은 역사아리랑 전시실과 팔도아리랑 전시실, 진도아리랑 전시실, 그리고 노래아리랑 체험실로 이뤄져 있다. 진도아리랑은 물론 전국 팔도 아리랑 등 유네스코에 등재된 아리랑을 이해하고 배우고 불러보는 체험관이다. 체험실에는 아리랑을 연주하고 불러볼 수 있는 북과, 징, 장구 등 악기들이 놓여 관람객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아리랑이 어떻게 우리 민족을 위로하며 민족음악으로 자리 잡았는지 알 수 있는 공간이다. 다만 찾아오는 이가 드물어 안타까울 뿐이다.

작곡가 안익태가 편곡한 ‘아리랑’ 악보. <최현배 기자>
의신면 사천리 첨찰산 남쪽 기슭에는 진도아리랑 가사가 새겨진 노래비인 ‘珍島(진도) 아리랑碑(비)’가 세워져 있다. 비에 새겨진 글씨는 장전 하남호 선생이 썼다. ‘진도아리랑은 모든 이의 원망도 슬픔도 신명 나는 가락과 해학적인 노랫말로 풀어주는 타령 중의 꽃이다… 우리 군민들은 이 멋과 정서의 뿌리를 널리 자랑하고 오래오래 이어갈 증표로 삼고자 뜻을 모아 여기에 이 비를 세운다’

석재 화강암으로 이뤄진 진도아리랑비는 전국적으로도 가장 웅장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는데 특히 빗돌은 여귀산에 있던 바위를 채굴해 첨찰산으로 옮겨 세워 ‘진도 제일의 명산에서 명산으로 시집’ 온 것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진도아리랑의 유래와 잊혀져가는 가사를 발굴하고 수집, 전승하기 위해 1985년 설립된 진도아리랑보존회. <진도군>
진도아리랑이 오랜 세월 동안 잊혀지지 않고 지금까지 전해오는 데는 진도아리랑보존회의 역할이 컸다. 진도아리랑의 유래와 잊혀져가는 가사를 발굴하고 수집, 전승하기 위해 1985년 박병훈 회장에 의해 설립된 보존회는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1985년부터 진도아리랑 가사 750 여수를 찾아 ‘진도아리랑 타령가사집’ 책자를 발간하고, 1995년에는 ‘진도아리랑비’ 건립을 후원하기도 했다.

국악의 고장답게 진도에는 아리랑 외에도 다수의 무형유산이 있다. 강강술래와 남도들노래, 씻김굿, 다시래기, 아리랑은 국가지정 중요무형유산으로, 진도북놀이와 남도잡가, 소포걸군농악, 조도닻배노래는 전남도 지정 무형유산으로 지정돼 남도민요·민속의 원형 그대로 보존·전승되고 있다.



/글=이보람·이종수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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