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예향] 진도 역사를 만나다, 삼별초와 이순신
2025년 07월 14일(월) 17:20
울돌목 회오리를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울돌목스카이워크. <최현배 기자>
진도를 탐방하는 길 위에서 ‘삼별초’라는 이름이 주는 울림은 크다. 고려 말 대몽 항쟁의 마지막 불씨이자, 나라 잃은 군사와 왕, 백성들이 칼끝 아래서 끝까지 놓지 않았던 자존심. 삼별초의 역사는 진도의 바다와 산, 골마다 짙게 흩어져 있다.

이곳에서 삼별초는 왕족 온을 추대하며 또 다른 고려 정부를 세웠고, 끈질기게 항몽의 깃발을 들었다. 남진한 삼별초가 궁전과 성을 짓고 항쟁을 벌였던 용장성, 패망 끝에 울음과 죽음이 이어진 궁녀둠벙,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저항의 땅 벽파진과 남도진성까지….

진도의 삼별초 유적은 여행자에게 단순한 유물이나 풍경이 아니다. 치열한 삶과 투쟁, 그리고 고요하고 서글픈 승리의 한 장면이 살아 숨 쉬는 ‘길’로 남았다. 이 길을 따라가며 역사의 현장을 천천히 밟아보는 것, 그 자체가 진도에서만 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다.

울돌목과 명량대첩지는 임란 역사의 중요한 공간이다. 좁은 해협 위를 스치는 물살, 진도와 해남을 잇는 울돌목은 진도와 해남 사이, 바다의 목처럼 좁고 긴 해협이다. 조수 간만의 차가 격렬한 이 수역은 폭이 약 294m에 불과하지만, 바닷물이 병목 구간을 통과할 때마다 암초에 부딪혀 소리를 내며 물길이 소용돌이치니, 예부터 “바다가 운다”는 뜻의 울돌목(명량·鳴梁)으로 불려왔다.

이곳은 곧 명량대첩의 무대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13척을 이끌고 130척의 왜선을 막은 곳, 삼별초 역시 그 여러 세월 앞뒤로 똑같이 바다와 섬, 남도의 땅을 오르내리며 끈질긴 항전의 정신을 이 해협에 남겼다.

지금도 울돌목 물살체험장 데크 위에 서면 해협을 뒤흔드는 파도와 거품, 바다 밑에서 솟구치는 소용돌이를 발밑으로 실감할 수 있다. 울돌목 일대에는 명량대첩 승전관, 이순신 기념관, 철쇠(鐵鎖) 체험, 노 젓기 체험, 바다를 가로지르는 해상케이블카 등 현대적 관광 요소도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다. 해협 위 스카이워크를 걸으면 명량의 거센 물살이 발 아래로 흐르고, 전망대에서는 다도해와 진도대교, 섬과 육지가 어우러진 진도의 또 다른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울돌목 가로지르는 명량해상케이블카

벽파진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다와 벽파정. <최현배 기자>
이곳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왜군에 맞서 조선을 지켜낸 역사의 현장인 명량대첩 전승지 울돌목 해협 위를 가로지르는 짜릿한 순간을 느낄 수 있다. 명량해상케이블카는 국내 최초로 역사의 현장에 개통된 해상케이블카다. 진도 군내면 녹지관광지 진도타워 앞에 위치한 스테이션과 해남 문내면 우수영관광지 스테이션까지 1km 구간을 운행한다. 바다가 우는 듯한 웅장한 소리와 함께 바닷물이 용솟음치면서 소용돌이가 생기는 울돌목 회오리, 다도해의 아름다운 낙조와 진도대교가 함께 빚어내는 환상적인 파노라마 뷰를 감상하며 명량대첩 그날의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삼별초 역사탐방로

삼별초가 진도를 근거지로 관군과 몽고군에 항전했던 용장산성 터. <최현배 기자>
진도의 삼별초 역사탐방로는 섬과 바다, 산과 마을이 살아 숨 쉬는 길이다.

삼별초 역사의 시작이자 진도 탐방의 첫머리는 벽파진이다. 이곳은 삼별초가 강화도를 떠나 진도 땅에 상륙한 관문이자 조선시대엔 수군영과 봉수망, 우국지사와 문인들이 오가며 시를 남겼던 남도의 거점이다. 벽파정이 언덕 위에 남아있고, 그 옆으로 명량대첩 기념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가 고요히 서 있다. 고려 말 이곳을 통해 삼별초와 왕온이 진입했고, 오늘날에도 벽파진은 유적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품는다. 벽파정 언덕 끝에는, 명량대첩 승리의 기쁨과 삼별초군이 남긴 저항의 흔적이 겹쳐 서 있다. 이충무공 전첩비와 옛 항구·솟구친 해풍·작은 어촌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면서도, 그 바다길을 건넜던 군사와 사신, 포구의 북적임이 느껴진다.

마지막 대몽항쟁지로 꼽히는 남도진성 성곽. <최현배 기자>
벽파진에서 용장성(사적 제126호)으로 향하는 산길은 삼별초가 실제로 진도에 정착해 또 다른 고려 정부를 세웠던 역사 현장과 직접 이어진다. 용장성 오르는 길은 한여름에도 솔잎 향이 진하게 풍긴다.

용장성은 해안산능선을 따라 13km에 달하는 대규모 산성으로, 삼별초가 진도에 세운 항몽 거점이자 일시적인 새로운 수도였다. 성 안에는 지금도 일부 석성 흔적과 행궁터, 용장사 부지 등 당시 궁궐의 자리와 건물 배치가 남아 있다. 2000년대 이후 곳곳에서 유물 발굴과 조사가 계속되어, 명문기와와 철마, 청자 조각, 군사시설 등 왕성했던 항몽정권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백성·군사·관리 1만여 명이 이곳을 중심으로 항몽투쟁을 벌이며 고려정부와 몽고군에 저항했다. 남쪽에서 올라 성벽을 더듬으며 오면, 능선 주요 지점마다 옛 석성의 흔적, 20여 동의 궁궐터, 용장사의 절터와 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현재 용장성 홍보관에서는 항몽기 명문 기와, 철제 마, 청자, 각종 군사용 유물과 항몽 충혼탑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성 곁을 따라 걷다보면 삼별초의 발자취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능선을 넘으며 높은 성벽 곁 망바위에 서면, 1000여 척의 배가 진도에 상륙했던 역사적 순간이 그려지는 듯하다.

삼별초 호국역사탐방길은 벽파진에서 시작해 목섬, 연동마을을 지나 선황산과 용장성까지 이어진다. 길 위에는 소나무 숲과 바위, 해안선이 한데 어우러져 있어 걷는 내내 바람과 바다의 기운이 스며든다. 여러 코스를 따라 넘는 백두개재 언덕은 삼별초와 여몽연합군이 맞붙었던 옛 전투터다. 숲길과 오솔길, 묵직한 석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삼별초의 항몽정신과 진도의 역사, 그리고 남도의 계절이 한 번에 어우러진다. 전설과 신화, 실재의 시간까지 촘촘하게 얽힌 이 탐방길에서 진도와 한 민족이 지켜낸 자부심 어린 여름을 천천히 걸을 수 있다.

용장성 근처에 세워진 고려항몽충혼탑. <최현배 기자>
용장성을 벗어나 남쪽으로 내려가면 군내면 산자락에 위치한 승화후 온의 묘, 왕온의 묘(전남기념물 제126호)가 기다리고 있다. ‘왕무덤재’라 불리는 이곳엔 2m 남짓 봉분과 돌호석, 석인상이 항몽 투쟁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왕온은 몽골에 끝까지 저항했던 삼별초의 마지막 고려왕으로, 1271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봉분과 20여m 떨어진 아래엔 그가 탔던 말의 무덤도 있다.

고려 삼별초 왕온의 묘로 향하는 숲길. <최현배 기자>
진도 역사트레킹은 남도진성(사적 127호)에서 다시 한 번 방향을 바꾼다. 임회면 남동리에 위치한 남도진성은 고려 삼별초의 최후 항전지이자, 조선 수군 만호진의 해군기지였다. 평지형에 가까운 이 곳은 고려~조선 초기 수군의 주둔지, 왜구 방어기지로 각각 활용돼온 곳으로, 객사·군기고 터 등 조선 시대부터 이어진 군사적, 행정적 유산이 공존한다.

남도진성 남문 주변을 흐르는 세운천(과거 해자 역할)에는 문화재자료 제215호인 쌍운교와 단운교 두 무지개 돌다리가 이어져 있어 산책 코스·사진 명소로도 인기다. 객사, 동헌, 내아, 군기고 등 옛 건물터가 복원·정비됐고, 최근에는 메타버스 체험존·AR보물찾기 등 체험콘텐츠도 운영돼 가족 단위 관광객에게도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고려시대 몽골군을 피하기 위해 궁녀들이 몸을 던진 곳으로 알려진 삼별초 궁녀둠벙. <최현배 기자>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에 있는 궁녀둠벙(유형유산 4호)에서 삼별초 항몽의 마지막 페이지를 듣게 된다. 패전 직후, 피란 중이던 궁녀들과 급창들이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투신한 이 깊은 둠벙에는 비 내리는 날이면 주변에서 여인네들의 슬픈 울음 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이 있다. 묵직하고 슬픈 역사가 남아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남도 바다만큼 꿋꿋한 여성들의 의지까지 느껴진다. 주변 저수지와 농촌 풍경, 간신히 남은 역사 안내판들은 조용하고 생각에 잠기게 한다.

/글=서민경·이종수 기자 minky@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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