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후무사 자두와 연애 - 장석주 시인
2025년 07월 11일(금) 00:00
무슨 자문회의를 하러 서울에 나갔다 마치고 돌아온다. 나는 서울에 나갔다가 폭염에 화들짝 놀란다. 올여름 일사광은 비명이 나올 만큼 뜨겁다. 공중이 하얀 화염에 점령된 듯한 이 폭염은 열탕 지옥이다. 공중에서 새가 폭염에 기절해서 갑자기 추락할 수도 있겠다. 건설 현장에 나갔던 외국인 노동자와 땡볕에서 밭일을 하던 노인이 온열병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전해졌다. 어쩌다 한반도가 열탕에 갇히게 되었을까?

내 스무 살의 여름도 더웠다. 여름이니 더운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시절의 더위는 올여름 같이 사납지는 않았다. 가정교사인 나는 여름 오후 4시에 폭염에 갇힌 거리를 지나 여중생의 집으로 간다. 아이는 수학과 영어 공부는 싫어하지만 피아노를 잘 친다. 아이는 나 들으라고 피아노 연습곡을 치는데 검은 머릿결에서 햇빛이 빛난다. 월말에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월급을 받는다. 그는 염전의 사장이고 나이가 많다. 딸은 늦둥이인 셈이다. 그는 월급을 주며 늦둥이 딸이 공부를 열심히 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렇다고 애매하게 대답한다.

서창에 해가 기운 뒤 버스정류장에서 퇴근하는 애인을 기다린다. 애인은 저녁 7시쯤에 도착한다. 우리는 칼국수를 먹은 뒤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플라타너스 가로수 아래를 걷는다. 나는 애인에게 줄 선물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월광’이라는 음반을 사러 음반가게를 간다. 또 다른 날엔 애인과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영화는 알랭 드롱이 나오는 ‘태양은 가득히’다. 푸른 바다에서 요트를 운전하는 알랭 드롱이 너무 잘 생겨서 질투가 날 지경이다.

애인은 비가 오면 반바지를 입고 빨간 장화를 신었다. 애인은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우리는 영화를 본 뒤 칼국수를 먹고 돌아와 집으로 돌아간다. 스무 살에 시작한 우리의 연애는 스물한 살에 끝났다. 왜 헤어졌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더위에 늘어진 플라타너스의 잎들과 먼지가 떠다니는 버스정류장 일대의 여름 저녁 풍경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여름 저녁 7시에 더는 버스정류장에 나가지 않게 되면서 내 여름은 시시해졌다.

나는 여름비와 붉은 배롱나무 꽃을, 제주 협재 바다를, 후무사 자두와 복숭아를 사랑한다. 여름비는 온수 같이 따뜻하다. 빨간 장화를 신은 애인은 내 앞에서 환하게 웃는다. 그 웃음으로 내 마음과 세상의 명도는 얼마쯤은 더 높아졌을 테다. 길바닥에 도랑을 이룬 빗물을 보며, 그 웃음을 만져볼 수 없구나, 생각하니 쓸쓸해진다. 장마가 끝나면 여름의 파란하늘에는 흰구름이 뭉개뭉개 피어오른다. 나는 샐러드를 씹어 먹는 어린 사자처럼 기분이 좋아져 시립도서관을 간다. 참고열람실 구석 자리에서 양자역학에 관한 책을 읽는다.

비 그친 여름밤에 맹꽁이들이 운다. 축축한 공기가 떠다니는 여름밤에 후무사 자두를 먹는다. 후무사 자두는 달고 시다. 그 달고 신 것을 먹고 달고 신 맛이 나는 시를 쓴다. 스무 살에 후무사 자두 세 개를 먹고 쓴 시에서는 후무사 자두향이 난다. 손에 묻은 후무사 자두향 냄새를 맡을 때 내 기분의 고도는 낮아진다. 언젠가 후무사 자두를 먹을 수 없겠지. 두꺼운 절망이 얇게 펴지면 우울로 변한다. 맹꽁이들이 맹렬하게 울어대는 여름밤에 나는 조금 우울하다.

여름은 아스팔트의 아스콘을 끈적이도록 만드는 태양의 계절, 비온 뒤 맹꽁이가 맹렬하게 울어대는 계절, 달고 신 후무사 자두를 먹고 달고 신 맛이 나는 시를 쓰던 계절, 흰구름 아래서 사자가 샐러드를 아삭아삭 씹어 먹는 계절, 스무 살의 청년들이 도서관 복도에서 서성이는 계절이다. 수많은 여름들이 지나갔다. 숱한 이들이 내게로 왔다가 떠나갔다. 나는 그 여름들의 과거이자 미래다. 나는 폭염을 견디면서도 여전히 여름을 사랑하지만 이제 여름이 마냥 즐겁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여름의 기대, 여름의 소슬한 꿈은 물거품처럼 꺼졌다. 그렇건만 새로운 여름이 돌아올 때마다 첫 연애의 기억과 함께 죽었던 연애세포가 오롯하게 살아난다. 여름에 만나서 여름에 헤어진 애인은 어디선가 이 폭염을 견디며 잘 살고 있겠지, 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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