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호의 키워드로 읽는 광주·전남 미술사] 불통의 시대 저항의식 붓 끝에… 사실주의적 회화관 풍속화 개척
[(4) 선비화가들의 시대정신-양팽손·윤두서의 회화]
■ 학포 양팽손
조선 전기 유학자…28세에 기묘사화에 휘말려 낙향
‘사계묵죽도’ 꺾여버린 꿈 등 시대 향한 비통함 담아
■ 공재 윤두서
정쟁 휘말려 25세에 관직 포기…시서화·신문물 탐구
소시민 그린 ‘짚신 삼기’ 등 18세기 풍속화 유행 선도
■ 학포 양팽손
조선 전기 유학자…28세에 기묘사화에 휘말려 낙향
‘사계묵죽도’ 꺾여버린 꿈 등 시대 향한 비통함 담아
■ 공재 윤두서
정쟁 휘말려 25세에 관직 포기…시서화·신문물 탐구
소시민 그린 ‘짚신 삼기’ 등 18세기 풍속화 유행 선도
![]()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1710, 국보 240호) |
지식인들이 세상을 대하는 의식과 태도는 글과 언행을 통해 나타난다. 옛 선비들도 여러 문적들을 통해 당대 상황과 세상에 대한 생각들을 남겼다. 운필력이 좋은 선비들은 시심을 담아낸 서화 작품들로 여기 취미를 즐기며 정신적 수양의 방편으로 삼기도 하였다. 실제로 빼어난 필묵 솜씨로 문자향을 품어낸 몇몇 문인화가들은 우리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한다.
호남지역은 전통적 예향이지만 회화사에서 지역의 화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기는 조선 말 이후다. 그 이전에는 서예로는 많지만 서화가로는 중간중간 공백이 있어 큰 맥을 이루지는 못한다. 조선시대 서화가로 잘 알려진 학포 양팽손(1488~1545), 공재 윤두서(1668~1715) 일가, 소치 허련(1808~1893) 일가는 전기, 중기, 말기에 활동했던 인물들로 이들 사이에도 공백들이 크다. 이들 외에 최근 연구자료에 따르면 고 운(1479~1530), 강 항(1567~1618), 허 목(1595~1682), 김익주(1684~미상), 임득명(1767~1822), 장의순(초의, 1786~1866), 김익로(1845~1915), 송수면(1847~1916) 일가, 김남전(1852~미상), 이자원(1855~1923) 일가, 김도숙(1872~1943) 등 조선시대에 서화를 남긴 광주·전남 지역 연고 인물들이 시기별로 드문드문 밝혀져 있다.(이선옥·김소영, ‘호남 서화가 사전’, 한국학호남진흥원, 2024)
◇학포의 묵죽도에 담긴 절의정신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은 조선 전기에 활동했던 유학자이자 문인화가다. 예향 남도의 회화사를 되짚을 때 이른 시기를 채워 주는 귀한 서화가다.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던 소쇄옹 양산보(1503~1557)와도 6촌간이어서 조선 전기 남도 문화를 살필 때 함께 엮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학포의 필묵이라 전해오는 유작이 많지는 않아 그의 서화 세계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뜸부기를 그린 ‘춘강계칙(春江鷄?)’ ‘산수도 목판’, ‘매죽도 판각’, ‘사계묵죽’, ‘연지도(蓮芝圖)’ 정도가 있는데, 화격이 뛰어난 작품들은 아니다. 이런 상황이라 그의 유작으로 추정되던 소상팔경도 형식의 ‘산수도’(16세기 전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최근 학계에서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굳어지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학포의 묵적이라 전하는 작품 가운데 ‘사계묵죽도’는 당시 정치 사회적 상황이나 개인사적 서사를 반영하고 있는 주목할만한 예다. 각 화폭마다 새 죽순이 돋거나, 이파리를 곧추세워 싱싱하게 뻗어 오르고, 추풍낙엽이듯 거센 강풍에 휘어져 흔들거리기도 하고, 굵은 대통이 찢긴 채 엄동설한에 얼어있는 모습이다.
그는 한창나이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정랑 등의 관직을 수행하며 정신적 지주이자 교우인 정암 조광조(1482~1520) 등과 더불어 신진사림으로 시대변혁을 꿈꿨다. 그러나 입신한 지 갓 3년 만에 훈구대신들의 술수에 의한 기묘사화(1519)에 휘말려 삭탈관직당하고 낙향하게 되었다. 게다가 정암이 자신의 고향 화순으로 유배된 뒤 지척에서 사약을 받고 절명하니 단장의 비통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사계묵죽도’가 학포의 진작이 틀림없다면 이 같은 극적인 인생사를 묵죽에 담아 회한을 표출한 것으로 읽힌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선비들의 여기취미 문인화가 아닌 절의의 상징 대나무에 극한의 심적 고통과 절망감을 담아낸 흉중성죽(胸中成竹)이라 할 것이다. 4폭의 그림마다 짝을 이뤄 등장하는 새 한 쌍들을 정암 조광조와 학포의 못다한 우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묵죽도가 품는 서사적 함의는 훨씬 더 진해진다. 정치적 의욕과 좌절의 함축이나 인간적 교분의 아쉬움과 함께 이 ‘사계묵죽도’는 격변기 정치 현실에 대한 비분강개 저항의식이 깔려있다고 본다면 이후 호남정신의 대맥에서 의기(義氣)의 표상으로 앞선 예이기도 하다.
◇공재의 인문학적 신문화 탐구와 현실 직시
앞서 보았듯이 학포 양팽손을 잇는 학맥이나 화맥 없이 몇몇 서화가들을 지나 조선 중기에 이르면 남도는 물론 한국 미술·문화사에서 큰 봉우리를 이룬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를 만나게 된다. 혈기 왕성한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도 당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시서화, 신문물을 탐구하며 세상에 한 발짝 비켜서 있었다. 그렇다고 비록 입신양명에는 뜻을 접었지만 유유자적 현실도피의 은일자는 아니었다. 조선 중기의 시대적 전환기에 부응하여 나라 안팎의 변화하는 현실을 직시하며 천문, 지리, 신문물 연구로 지적 열망에 아낌없이 매진한 인문학자였다. 또한, 그림에도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여 중국 고전 산수화풍은 물론 조선의 문인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남종화풍을 앞서 탐구하고, 준마, 도석인물, 지도 외에도 현실주의 풍속화들로 시대상과 주변 무지렁이들의 삶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공재의 서화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현실 직시 사실주의 인물화들이다. 이전까지 선비나 양반 문인이 산수, 사군자가 아닌 인물, 그것도 얼굴만을 집중하여 내면을 탐구하거나, 중국식 인물화가 아닌 조선의 빈한한 서민들의 세상살이 모습을 실감 나게 묘사한 예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자화상’(1710)은 한국 초상화의 최고 걸작으로 국보로 지정될 정도다. 과감하게 두상만을 화면에 채우고, 눈매에는 정신세계의 깊은 내공과 현실 직시 의지가 생기있게 담겨있으며, 미세하게 흩날리는 듯한 수염은 실재감을 더한다. 이러한 세필담먹 사실적 묘사의 인물화는 같은 시기에 그린 ‘심득경초상’에서 다른 방식을 보이기도 한다. 자화상과는 달리 비스듬히 앉은 전신상이면서, 굵은 옷주름에 음영을 넣어 선비의 고아한 품격을 담백하게 그려내었다.
공재의 작품 중 회화사에서 주목하는 또 다른 화제는 풍속화들이다. 처가 증조부인 이수광의 영향도 있겠지만 관념적 성리학 대신 현실 개혁적 의식하에서 실용성과 경험적 태도를 취하는 실학의 흐름에서도 앞선 행적들이다. ‘나물 캐기’, ‘돌깨기’, ‘짚신 삼기’, ‘목기 깎기’ 등 소시민들의 생활 모습 그대로를 마치 현장 스케치하듯 특별한 관찰력과 순발력으로 그려낸 그림들이다. 특히 가장 많이 알려진 ‘나물 캐기’는 현대회화 감각에 못지않은 화면구도의 짜임새와 단순 처리한 배경의 대담함, 두 아낙의 현실감 나는 자세에서 빼어난 걸작이다. 그의 대부분 풍속화들은 인물 중심에 풍경 요소를 최소화한 소품들이면서도 인물들의 일하는 자세에서 특징과 표정까지 압축해서 포착해낸 묘미가 돋보인다. 공재의 이들 풍속화들은 이후 민족문화 중흥기인 18세기 조선 풍속화의 유행을 이끈 선도적 역할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한편, 공재의 회화사적 위치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남종화의 앞선 탐구 습득이다. 이는 한국 회화사 흐름에서도 앞서지만, 특히 남도가 후에 호남 남화로 지역 화풍을 이루게 되는 것과 연결해서 그 선도자이기 때문이다. 워낙 높은 지적 탐구욕으로 중국의 수많은 명화들을 접하며 안목을 높이고, 남종문인화 교본이라 할 ‘고씨역대명인화보(顧氏歷代名人畵譜)’ 등을 통해 화면구성과 필법들을 익히며 문기 어린 회화세계를 독학하였다. ‘강안산수도(江岸山水圖’), ‘수애모정도(水涯茅亭圖)’, ‘평사낙안도(平沙落雁圖)’, ‘월야산수도’, ‘조어도’ 등 그윽한 시적 정취의 담묵 산수화들은 조선말 소치 허련을 통해 시대를 풍미하게 되는 호남 남종화풍의 선도적 길트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또한 아들 낙서 윤덕희(1685~1766)와 손자 청고 윤 용(1708~1740)까지 3대가 서화가로 가계를 이은 것도 조선말 허씨 일가처럼 뒤가 계속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호남화단에서는 중요한 가맥이다.
학포와 공재의 활동 시기는 서로 200여 년이 벌어져 몇 세대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당대 시대 상황이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하는 작품들로 지식인의 정신세계와 세상 현실에 대한 시각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또한 호남미술의 큰 특징인 시정 어린 묵향, 의기와 시대정신이 깔린 현실주의 회화의 앞선 예들이라는 점에서도 호남 화맥의 소중한 자산이다.
조인호 전문가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한국미술사 전공.
▲ (재)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정책기획실장 역임
▲‘남도미술의 숨결’, ‘광주 현대미술의 현장’ 등 출간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 공재 윤두서의 ‘강안산수도(江岸山水圖)’, 17세기 말~18세기 초. |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은 조선 전기에 활동했던 유학자이자 문인화가다. 예향 남도의 회화사를 되짚을 때 이른 시기를 채워 주는 귀한 서화가다.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던 소쇄옹 양산보(1503~1557)와도 6촌간이어서 조선 전기 남도 문화를 살필 때 함께 엮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학포의 필묵이라 전해오는 유작이 많지는 않아 그의 서화 세계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뜸부기를 그린 ‘춘강계칙(春江鷄?)’ ‘산수도 목판’, ‘매죽도 판각’, ‘사계묵죽’, ‘연지도(蓮芝圖)’ 정도가 있는데, 화격이 뛰어난 작품들은 아니다. 이런 상황이라 그의 유작으로 추정되던 소상팔경도 형식의 ‘산수도’(16세기 전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최근 학계에서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굳어지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학포의 묵적이라 전하는 작품 가운데 ‘사계묵죽도’는 당시 정치 사회적 상황이나 개인사적 서사를 반영하고 있는 주목할만한 예다. 각 화폭마다 새 죽순이 돋거나, 이파리를 곧추세워 싱싱하게 뻗어 오르고, 추풍낙엽이듯 거센 강풍에 휘어져 흔들거리기도 하고, 굵은 대통이 찢긴 채 엄동설한에 얼어있는 모습이다.
그는 한창나이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정랑 등의 관직을 수행하며 정신적 지주이자 교우인 정암 조광조(1482~1520) 등과 더불어 신진사림으로 시대변혁을 꿈꿨다. 그러나 입신한 지 갓 3년 만에 훈구대신들의 술수에 의한 기묘사화(1519)에 휘말려 삭탈관직당하고 낙향하게 되었다. 게다가 정암이 자신의 고향 화순으로 유배된 뒤 지척에서 사약을 받고 절명하니 단장의 비통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사계묵죽도’가 학포의 진작이 틀림없다면 이 같은 극적인 인생사를 묵죽에 담아 회한을 표출한 것으로 읽힌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선비들의 여기취미 문인화가 아닌 절의의 상징 대나무에 극한의 심적 고통과 절망감을 담아낸 흉중성죽(胸中成竹)이라 할 것이다. 4폭의 그림마다 짝을 이뤄 등장하는 새 한 쌍들을 정암 조광조와 학포의 못다한 우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묵죽도가 품는 서사적 함의는 훨씬 더 진해진다. 정치적 의욕과 좌절의 함축이나 인간적 교분의 아쉬움과 함께 이 ‘사계묵죽도’는 격변기 정치 현실에 대한 비분강개 저항의식이 깔려있다고 본다면 이후 호남정신의 대맥에서 의기(義氣)의 표상으로 앞선 예이기도 하다.
![]() 학포 양팽손의 ‘사계묵죽도’(부분), 16세기 전반. |
앞서 보았듯이 학포 양팽손을 잇는 학맥이나 화맥 없이 몇몇 서화가들을 지나 조선 중기에 이르면 남도는 물론 한국 미술·문화사에서 큰 봉우리를 이룬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를 만나게 된다. 혈기 왕성한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도 당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시서화, 신문물을 탐구하며 세상에 한 발짝 비켜서 있었다. 그렇다고 비록 입신양명에는 뜻을 접었지만 유유자적 현실도피의 은일자는 아니었다. 조선 중기의 시대적 전환기에 부응하여 나라 안팎의 변화하는 현실을 직시하며 천문, 지리, 신문물 연구로 지적 열망에 아낌없이 매진한 인문학자였다. 또한, 그림에도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여 중국 고전 산수화풍은 물론 조선의 문인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남종화풍을 앞서 탐구하고, 준마, 도석인물, 지도 외에도 현실주의 풍속화들로 시대상과 주변 무지렁이들의 삶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공재의 서화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현실 직시 사실주의 인물화들이다. 이전까지 선비나 양반 문인이 산수, 사군자가 아닌 인물, 그것도 얼굴만을 집중하여 내면을 탐구하거나, 중국식 인물화가 아닌 조선의 빈한한 서민들의 세상살이 모습을 실감 나게 묘사한 예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자화상’(1710)은 한국 초상화의 최고 걸작으로 국보로 지정될 정도다. 과감하게 두상만을 화면에 채우고, 눈매에는 정신세계의 깊은 내공과 현실 직시 의지가 생기있게 담겨있으며, 미세하게 흩날리는 듯한 수염은 실재감을 더한다. 이러한 세필담먹 사실적 묘사의 인물화는 같은 시기에 그린 ‘심득경초상’에서 다른 방식을 보이기도 한다. 자화상과는 달리 비스듬히 앉은 전신상이면서, 굵은 옷주름에 음영을 넣어 선비의 고아한 품격을 담백하게 그려내었다.
공재의 작품 중 회화사에서 주목하는 또 다른 화제는 풍속화들이다. 처가 증조부인 이수광의 영향도 있겠지만 관념적 성리학 대신 현실 개혁적 의식하에서 실용성과 경험적 태도를 취하는 실학의 흐름에서도 앞선 행적들이다. ‘나물 캐기’, ‘돌깨기’, ‘짚신 삼기’, ‘목기 깎기’ 등 소시민들의 생활 모습 그대로를 마치 현장 스케치하듯 특별한 관찰력과 순발력으로 그려낸 그림들이다. 특히 가장 많이 알려진 ‘나물 캐기’는 현대회화 감각에 못지않은 화면구도의 짜임새와 단순 처리한 배경의 대담함, 두 아낙의 현실감 나는 자세에서 빼어난 걸작이다. 그의 대부분 풍속화들은 인물 중심에 풍경 요소를 최소화한 소품들이면서도 인물들의 일하는 자세에서 특징과 표정까지 압축해서 포착해낸 묘미가 돋보인다. 공재의 이들 풍속화들은 이후 민족문화 중흥기인 18세기 조선 풍속화의 유행을 이끈 선도적 역할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 공재 윤두서의 ‘나물 캐기(採艾圖)’, 17세기 말~18세기 초. |
학포와 공재의 활동 시기는 서로 200여 년이 벌어져 몇 세대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당대 시대 상황이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하는 작품들로 지식인의 정신세계와 세상 현실에 대한 시각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또한 호남미술의 큰 특징인 시정 어린 묵향, 의기와 시대정신이 깔린 현실주의 회화의 앞선 예들이라는 점에서도 호남 화맥의 소중한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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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한국미술사 전공.
▲ (재)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정책기획실장 역임
▲‘남도미술의 숨결’, ‘광주 현대미술의 현장’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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