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스콘신의 역설을 넘어서기 위하여 - 강수돌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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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선거철만 되면 나는 두 가지를 떠올린다. 하나는 장 자크 루소의 명언으로 “모든 국민은 투표하는 순간에만 주인이지, 투표가 끝나자마자 다시 노예가 된다”는 말,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마우스콘신’이라는 미국의 독립영화다.
루소의 명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알면서도 또 오류를 반복한다. 우리를 노예로 부리려는 자들을 내 손으로 직접 뽑는 어리석음, 과연 이는 언제쯤 끝날 것인가? 물론, 현실과 원칙의 차이는 늘 존재하고 그래서 갈등한다.
루소의 명언보다 더 와 닿는 것은 5분짜리 독립영화 ‘마우스콘신’이다. 마우스콘신이란 미국의 위스콘신 주를 패러디한 것으로 쥐들이 사는 마을이다. 이 쥐들의 마을에 선거가 닥친다. 여러 공약들이 난무하고 마침내 대표(대통령)를 뽑는다. 우습게도 고양이가 쥐들의 대표로 선출된다. 모든 쥐들은 4~5년 간 이리저리 시달린다. 심지어 꼬리가 잘리거나 통째로 잡아먹히며 피를 흘린다.
그렇게 피비린내 풍기는 세월이 지나 또 선거를 한다. 어이없게도 지난번엔 검은 고양이, 이번엔 흰 고양이가 뽑힌다. 설마~ 했는데, 역시~다. 또다시 쥐들은 한숨을 쉬며 고양이에게 거듭 시달린다. 겉으로는 좀 나아지는 면도 있지만 실상에서는 더 가혹해진다. 고양이들이 쥐를 지배하는 노하우가 쌓인 탓이다. 또 피 흘리는 고통의 세월이 지나 다시 선거철이 온다. 아이쿠, 이번엔 얼룩 고양이가 뽑힌다. 얼룩 고양이는 처음엔 쥐들의 목소리를 듣는 척 하더니 갈수록 목을 더 죈다.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긴다. 또 다른 고통의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새 선거가 온다. ‘마우스콘신의 역설’이다.
그런데 이제는 놀랍게도 쥐 한 마리가 용감히 일어선다. “쥐 여러분, 이제는 절대 고양이를 뽑지 말고 우리 스스로 나섭시다!” 이 외침에 수많은 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영화는 ‘쥐 죽은 듯’ 끝난다. 5분짜리 영화지만 큰 울림을 준다.
자, 이제 이 영화의 교훈을 우리네 현실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쥐들의 마을에서 고양이를, 우리들을 노예로 만들려는 자들을 대표랍시고 뽑는 어리석음을 반복 않으려면?
첫째, 나는 민주, 진보, 양심 세력을 우리의 대표(1명)로 뽑기 위해서라도 ‘선명성 경쟁’보다는 후보 단일화가 ‘현실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승리 후 역할분담이나 진보 개혁 합의는 그 전제조건이다.) 솔직히, 나는 예전엔 선명성 경쟁을 중시했다. 설사 낙선을 하더라도 민주, 진보, 양심을 선명하게 외치는 것이 대중적 감동을 줌으로써 차후엔 당선 가능성이 높아질 거라 보았다. 그러나 나는 지난 20~30년 사이에 출마자는 물론 유권자들이 ‘별로’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즉, 아직도 한국 사회는 깊은 ‘집단 트라우마’와 ‘강자 동일시’로 인해 ‘민주 개혁’ 정도엔 동의를 하지만 ‘사회 변혁’ 구호엔 두려움을 느낀다. 원론과 현실의 차이다. 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민주 후보와 진보 후보 간 경쟁을 하면 결국 수구(극우) 세력에게 ‘어부지리’만 넘긴다.
둘째, 그럼에도 나는 자본이 인간과 자연을 망치는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의 대안은,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을 뽑을 때는 지금처럼 지역구별 개인을 뽑는 게 아니라 오로지 정당에만 표를 주는 새 제도(100% 정당비례대표제)를 만드는 것이다. 각 정당이 지역, 직업, 성별, 나이 등을 감안, 예비후보 명단을 미리 제출한 상태에서 득표율을 보고 선정하면 된다. 그리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양대 정당이 아니라 무지개 빛깔의 다양한 정당들이 선의의 경쟁을 하거나 연립정부를 운영하는 모습을 볼 것이다.
셋째, 초·중·고·대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의 민주시민교육을 일상화해야 한다. 평소에 독서, 토론, 발표 등을 꾸준히 해야 선거 등 중대사 결정 시에도 올바른 선택을 할 것이다. 더 이상 혈연, 지연, 학연 같은 게 아닌 정책, 비전, 철학 등이 기준이 돼야 한다. 잘못된 한 표가 세상을 망친다! 이제, 나는 누구를 뽑을 것인가?
루소의 명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알면서도 또 오류를 반복한다. 우리를 노예로 부리려는 자들을 내 손으로 직접 뽑는 어리석음, 과연 이는 언제쯤 끝날 것인가? 물론, 현실과 원칙의 차이는 늘 존재하고 그래서 갈등한다.
그런데 이제는 놀랍게도 쥐 한 마리가 용감히 일어선다. “쥐 여러분, 이제는 절대 고양이를 뽑지 말고 우리 스스로 나섭시다!” 이 외침에 수많은 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영화는 ‘쥐 죽은 듯’ 끝난다. 5분짜리 영화지만 큰 울림을 준다.
자, 이제 이 영화의 교훈을 우리네 현실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쥐들의 마을에서 고양이를, 우리들을 노예로 만들려는 자들을 대표랍시고 뽑는 어리석음을 반복 않으려면?
첫째, 나는 민주, 진보, 양심 세력을 우리의 대표(1명)로 뽑기 위해서라도 ‘선명성 경쟁’보다는 후보 단일화가 ‘현실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승리 후 역할분담이나 진보 개혁 합의는 그 전제조건이다.) 솔직히, 나는 예전엔 선명성 경쟁을 중시했다. 설사 낙선을 하더라도 민주, 진보, 양심을 선명하게 외치는 것이 대중적 감동을 줌으로써 차후엔 당선 가능성이 높아질 거라 보았다. 그러나 나는 지난 20~30년 사이에 출마자는 물론 유권자들이 ‘별로’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즉, 아직도 한국 사회는 깊은 ‘집단 트라우마’와 ‘강자 동일시’로 인해 ‘민주 개혁’ 정도엔 동의를 하지만 ‘사회 변혁’ 구호엔 두려움을 느낀다. 원론과 현실의 차이다. 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민주 후보와 진보 후보 간 경쟁을 하면 결국 수구(극우) 세력에게 ‘어부지리’만 넘긴다.
둘째, 그럼에도 나는 자본이 인간과 자연을 망치는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의 대안은,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을 뽑을 때는 지금처럼 지역구별 개인을 뽑는 게 아니라 오로지 정당에만 표를 주는 새 제도(100% 정당비례대표제)를 만드는 것이다. 각 정당이 지역, 직업, 성별, 나이 등을 감안, 예비후보 명단을 미리 제출한 상태에서 득표율을 보고 선정하면 된다. 그리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양대 정당이 아니라 무지개 빛깔의 다양한 정당들이 선의의 경쟁을 하거나 연립정부를 운영하는 모습을 볼 것이다.
셋째, 초·중·고·대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의 민주시민교육을 일상화해야 한다. 평소에 독서, 토론, 발표 등을 꾸준히 해야 선거 등 중대사 결정 시에도 올바른 선택을 할 것이다. 더 이상 혈연, 지연, 학연 같은 게 아닌 정책, 비전, 철학 등이 기준이 돼야 한다. 잘못된 한 표가 세상을 망친다! 이제, 나는 누구를 뽑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