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법도 법인가? - 윤영기 정치·경제에디터
2025년 05월 18일(일) 22:00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며 독배를 마신 일화는 1980년대 중·고교 교과서에 등장했다. “부당하게 신을 모독하고 아테네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소크라테스는 국외 탈출을 권유받았다. 그러나 악법이라 해도 법을 어겨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기꺼이 독약을 마셨다”는 내용이다.

소크라테스 일화는 공동체 일원으로서 지켜야할 준법정신을 강조하는 데 활용됐다. 훗날 일부 법학자는 군사정권이 ‘악법도 법’이라는 법실증주의를 신봉함으로써 국민의 민주적인 법의식을 효과적으로 봉쇄하고 정권을 유지했다고 평가한다.

국내 학계에서 소크라테스 ‘신화’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선 이는 강정인 서강대 교수다. 1983년 한국정치학회보에 발표한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라는 논문에서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직접 말했다는 인용은 근거가 전혀 없는 전설 또는 낭설이라며 교과서에서 삭제하라고 주장했다.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와 의인화된 아테네 법률의 대화에 나오는 몇 구절을 전체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과도하게 일반화한 해석론이라고 통박했다. 크리톤은 ‘악법도 법의 출처’로 거론되는 플라톤의 기록이다.

강 교수는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판결만이 부정의한 것이라고 판단했을 뿐, 아테네의 법률에 관한 한 어떠한 하자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아테네 정치질서 일반에 관해서도 아무런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강 교수의 주장이 공감을 얻으면서 국가인권위와 헌법재판소는 교육 당국에 초·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소크라테스의 일화를 수정하도록 권고하기도 했다.

강정인 교수가 최근 타계했다. 그가 논문 말미에 쓴 문제의식은 아직 유효하다. “막연히 ‘민주시민’의 ‘준법의무’를 강조하는 남한의 교과서는 그러한 민주시민이 충성을 바칠 가치가 있는 민주사회와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언제, 어떠한 조건 하에서 법규준수의무에서 해방돼 독재정권에 저항·봉기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윤영기 정치·경제에디터 penfoot@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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