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사탕같은- 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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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인형은 귀엽다. 모든 곰인형은 만들어질 때부터 의도적으로 귀엽게 만들어졌다. 생긴 것도 귀엽지만, 솜이 들어가서 푹신푹신하고 표면은 부들부들하다. 이런 촉감은 눈으로 볼 때의 귀여움을 훨씬 뛰어넘는 매력 포인트다. 곰인형은 인간이 생각하는 귀여움의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과하게 커다란 얼굴, 조막만한 손과 발, 덩치에 비해 짧은 팔과 다리, 매우 부드럽고 따뜻한 피부.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곰인형을 애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가질 법한 생각이다. 곰인형의 입장이라면, 솜방망이처럼 타격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신의 신체조건 때문에 절망할지도 모른다. 제아무리 화가 나서 주먹을 휘두르고 온몸으로 들이 받아도 상대방에게는 조금의 고통도 주지 못한다. 입은 있으나 소리를 낼 수 없고, 주먹은 있으나 휘둘러보아야 아무 소용 없다. 끙끙 앓으며 혼자 속으로 화를 짊어질 수밖에 없다.
곰인형이라고 해서 평생동안 인고의 세월만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곰인형의 무기는 인간들을 사로잡는 매력이다. 아마 곰인형 자신도 그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곰인형은 자신의 매력으로 타고난 무력함을 상쇄시킨다. 이 역시 어린아이로부터 빌려온 특징이다. 모든 동물들의 어린 생명들이 귀여운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제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앳된 이 생명체들은 자신을 방어할 무기가 없다. 그래서 최대한 귀엽게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모든 새끼들은 귀엽다. 귀여우면 귀여울수록 보호자들은 그들에게 사랑을 쏟아붓는다. 유아들의 귀여움은 자신들의 보호자를 유혹하여 무력한 자신을 지키게 하려는 전략의 산물이다.
정반대로 세상에는 선인장같은 사람도 있다. 온 몸을 뒤덮고 있는 가시는 누구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 방어막이자, 뛰어난 공격무기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선인장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설령 선인장 본인은 그런 의도가 전혀 없어도 그의 가시가 다른 존재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른 존재들은 그를 기피하고 멀리 한다. 항상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고 있는 그를 따뜻하게 안아줄 이는 아무도 없다. 선인장은 날카로운 가시 덕분에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대신 아무도 가까이 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롭다. 심지어 지나친 애정은 선인장을 죽이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무지한 애정 때문에 선인장에게 과하게 물을 주고, 그 결과 선인장은 죽고 만다. 설령 선인장 자신은 주변의 사랑을 원할지라도 그것은 그에게 독이 된다. 그렇게 선인장은 진화하였다. 사람들은 선인장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곰인형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꼭 들어맞는다. 선인장 유형에 비하자면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바로 그 사람들 때문에 일희일비하는 삶을 매일 반복하며 살아간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몽땅 의지한 결과 나타나는 현상이다. 선인장 유형의 사람들은 외로움에 쩔어 외로운지도 모르는 채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힘들어하면서도 사람들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너무나 힘들어 홀로 떨어져 나오면 외로움이 엄습한다. 다시 사람들 속으로 돌아가면 예전의 고통이 그대로 되살아난다.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다보면 또다시 홀로 된 자신을 발견한다. 외로움이라는 질병에 서서히 병들어 간다. 시계추처럼 반복되는 삶이 끝없이 이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인장과 곰인형 사이의 어중간한 어디쯤에서 방황하며 살아간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미로에 갇힌 생쥐처럼 헤어나오지 못한 채 빙빙 맴돌고 있다. 한걸음만 떨어져서 상황을 바라보면 문제가 보인다. 문제가 보이면 답도 보인다.
세상에는 곰인형이나 선인장같은 존재들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솜사탕 같은 존재도 있다. 솜사탕은 자신의 몸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설령 녹아 없어지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내가 딱히 어떤 모양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나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다. 늙고 병든 육신이든 젊고 건강한 육신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육신에 대한 애착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솜사탕같은 사람으로 살 수 없다. ‘나’라는 이름의 감옥에는 창살도 높은 벽도 없다. 다만 내가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육신에 발목 잡히지 않은 것이 정신적으로 자립하는 길이다. 새소리가 정겨운 봄날의 아침이다. 참 고마운 날들이다.
곰인형이라고 해서 평생동안 인고의 세월만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곰인형의 무기는 인간들을 사로잡는 매력이다. 아마 곰인형 자신도 그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곰인형은 자신의 매력으로 타고난 무력함을 상쇄시킨다. 이 역시 어린아이로부터 빌려온 특징이다. 모든 동물들의 어린 생명들이 귀여운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제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앳된 이 생명체들은 자신을 방어할 무기가 없다. 그래서 최대한 귀엽게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모든 새끼들은 귀엽다. 귀여우면 귀여울수록 보호자들은 그들에게 사랑을 쏟아붓는다. 유아들의 귀여움은 자신들의 보호자를 유혹하여 무력한 자신을 지키게 하려는 전략의 산물이다.
곰인형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꼭 들어맞는다. 선인장 유형에 비하자면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바로 그 사람들 때문에 일희일비하는 삶을 매일 반복하며 살아간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몽땅 의지한 결과 나타나는 현상이다. 선인장 유형의 사람들은 외로움에 쩔어 외로운지도 모르는 채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힘들어하면서도 사람들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너무나 힘들어 홀로 떨어져 나오면 외로움이 엄습한다. 다시 사람들 속으로 돌아가면 예전의 고통이 그대로 되살아난다.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다보면 또다시 홀로 된 자신을 발견한다. 외로움이라는 질병에 서서히 병들어 간다. 시계추처럼 반복되는 삶이 끝없이 이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인장과 곰인형 사이의 어중간한 어디쯤에서 방황하며 살아간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미로에 갇힌 생쥐처럼 헤어나오지 못한 채 빙빙 맴돌고 있다. 한걸음만 떨어져서 상황을 바라보면 문제가 보인다. 문제가 보이면 답도 보인다.
세상에는 곰인형이나 선인장같은 존재들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솜사탕 같은 존재도 있다. 솜사탕은 자신의 몸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설령 녹아 없어지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내가 딱히 어떤 모양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나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다. 늙고 병든 육신이든 젊고 건강한 육신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육신에 대한 애착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솜사탕같은 사람으로 살 수 없다. ‘나’라는 이름의 감옥에는 창살도 높은 벽도 없다. 다만 내가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육신에 발목 잡히지 않은 것이 정신적으로 자립하는 길이다. 새소리가 정겨운 봄날의 아침이다. 참 고마운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