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된 방직공장, 아직 남아있는 그 시절의 이야기
과거 광주 산업단지의 ‘심장’…한때 3000여 명 근무
여공 모여 살던 발산마을…뿅뿅 다리서 사랑 싹트기도
‘더 현대 광주’ 건설에 공장 터 철거되자 “시원섭섭”
2025년 05월 05일(월) 12:25
전남·일신방직 공장 대부분이 철거되었고, 화력발전소 건물 일부가 남아있다.
“한 때는 우리네 삶의 터전이었는데, 공장터마저도 사라진다니 시원섭섭하지.”

복합쇼핑몰 ‘더현대 광주’ 건축을 위해 철거가 진행되는 옛 전남·일신방직 공장 터를 바라보던 발산마을 주민 김금예(여·75)씨의 말이다. 과거 광주 산업단지의 심장이라 불리던 전남·일신방직, 김씨는 그곳에서 일하던 3000여 명의 여공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방직공장은 사라졌지만, 이곳에서 청춘을 바쳤던 이들은 여전히 공장 바로 옆 발산마을에 살아가고 있다.

그 시절 방직공장은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했던 직장’이었다. 광주를 비롯해 호남에선 가장 나은 일자리로 통했고, 들어가기 위해선 키와 체중 기준도 맞춰야 했다.

면접 탈락을 피하려고 치마에 돌을 넣어 몸무게를 불리는 건 흔한 일이었다. 어떤 이들은 공장 관리자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눈도장을 찍었고, 어떤 이는 몰래 돈을 찔러 넣으며 취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만큼 전남·일신방직은 모두가 앞다퉈 들어가려 했던 ‘좋은 직장’이었다. 면접장에 들어가기 전, 손거울로 외모를 가다듬던 기억도 그녀는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기숙사는 늘 만원(滿員)이었고,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한 여공들은 근처 발산마을로 흘러 들었다.

발산마을은 살 곳을 찾아온 여공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골목길에선 남녀 간의 사랑싸움이 있기도 했고, 뿅뿅다리 밑에선 여공들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는 청년들이 기웃대기도 했다.

공장 안의 생활은 고됐다. 35도를 유지해야 하는 작업 환경에 먼지가 날려 눈을 제대로 뜨기 어려웠다.

작업복과 함께 챙겨야 했던 건 손수건이었다. 김씨는 “눈에 융털이 들어가니까 손수건 없이는 일을 못 했다”라고 회상했다.

작업 도중 욕이 오가고, 감정이 상해도 아랑곳 않고 일해야 했다.

서복수 씨는 마을 전경을 바라보며 “많이 바뀌어들 간다”고 시원섭섭함을 드러냈다.


김씨는 “광주에서 제일 시급도 세고 좋은 일자리인데 절대 잘리면 안 됐다. 만약 잘리게 되면 갈 곳도 없었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작업이 길어져 피로가 쌓여도 쉽게 쉴 수 없었다. 그나마 가능한 휴식이라곤, 옆 사람에게 “실만 안 떨어지게 잘 봐달라”는 부탁을 하고 화장실 칸에 들어가 5분 정도 눈을 붙이는 게 전부였다.

1980년대 들어 공장에 컴퓨터 제어 기계가 도입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기계 한 대에 3~4명이 붙었는데, 나중에는 기계 3대를 한사람이 보게 됐다. 이후 기계가 늘어나면서 직원들은 하나 둘 공장을 떠나게됐다.

일자리를 잃은 이들은 점차 마을을 떠났고, 북적이던 발산마을도 점차 조용해졌다. 김씨도 그 무렵 공장을 나오게 됐다. 하지만 다른 여공들과는 달리 그는 발산마을에 그대로 정착했고,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또 다른 발산마을의 주민 이순옥(70)씨의 남편은 전남방직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다.

이씨는 “한달에 8만원 정도 받았다”고 회상했다. 방세와 전기세, 물세를 내면 남는 건 없었다.

옷을 사는 등 사치를 부린 적도 없었다.

이씨는 “묵은지나 해먹고 살았지, 옷 같은 건 살 생각도 해본적 없었다”고 웃어보였다.

퇴근 후 이씨의 남편이 근처 튀김가게에서 사온 튀김은 유일한 사치였다.

이씨는 “튀김 하나 들고 가족들과 나눠먹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그 시절 유일한 여유가 바로 그 퇴근길 튀김이었다”고 설명했다.

김금예씨가 당시 방직공장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1968년부터 발산마을에 거주해온 서복수(80)씨 역시 당시 마을 풍경을 또렷이 기억한다.

서씨는 “방직공장이 있어서 그런지, 이 주변은 죄다 누에가 먹는 뽕나무 밭이었다. 그때 하천가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여자들은 거기서 빨래하면서 수다를 떨었다. 다들 먹고 살기 바빠서 아침이면 분주하게 움직였다”고 말했다.

시간이 흐르며 여공들이 빠져나가고, 마을도 점차 쇠락으로 접어들었다. 빈집이 하나둘 늘어났고, 오랜 기간 침체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러다 최근 들어 ‘청춘발산마을’ 사업 등으로 청년층이 유입되면서 마을엔 조금씩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마을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없던 것이 생기고, 있던 것이 사라졌다.

서씨는 “시원섭섭한 면이 있다. 세월이 많이 간 것 같기도 하다. 매일 바라보던 풍경 중 하나가 방직공장 전경이었는데, 이제 그것도 못 본다고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이 크다”고 고개를 저었다.

현재 전남·일신방직 부지엔 복합쇼핑몰 착공이 예정돼 있다.

오랫동안 멈춰 있었던 공간에 변화가 찾아온다는 점에서, 주민들 다수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달동네가 돼 버린 발산마을 주변으로 복합쇼핑몰이 생기면 활기가 생길 거라는 주민들도 있었지만 되려 동네 상권이 힘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이어졌다.

익숙했던 풍경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것이 들어선다는 건, 늘 기대와 불안이 함께 묻어나는 일이다. 이제는 여공도 떠나고, 공장도 사라지고, 어느덧 마을만 남은 공간. 방직공장과 발산마을의 이음새가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글·사진=광주일보 대학생 기자단 정의찬

/정리=김다인 기자 kd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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