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다시 돌아오는 것들에 대하여- 김향남 수필가
2025년 04월 21일(월) 00:00
잊고 있던 것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앙상하던 가지에 수액을 맞은 듯 푸른 혈류가 돌더니 이내 무성해지는 중이고, 온갖 풀과 꽃들이 불멸의 혼처럼 깨어나 사방천지에 색동옷을 입히고 있다. 새들은 더 소리 높여 아침을 노래하고, 나는 가만히 있어도 어쩐지 마음이 부푼다. 수많은 봄을 겪어 왔지만, 다시 또 설레고야 만다.

지난해 늦봄, 부모님 묘소 앞에 작약 몇 포기를 심어두었다. 화사한 꽃망울을 보시면 두 분도 흐뭇해하실 것 같아서였다. 살아생전 다하지 못한 효도를 그렇게라도 전해보려는 마음에 가슴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자 무성하던 잎사귀가 하루아침에 사그라져버렸다. 기대했던 마음이 허탈하게 무너져내렸다. 그래도 뿌리는 살아 있겠지? 희망이야 끝내 버리지 못했으나 그마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여름 지나고 가을 겨울도 지나고 다시 돌아온 이 봄날, 보란 듯이 다시 돌아와 있는 것이 아닌가. 검불 덮인 땅을 가르고 쏙쏙 고개를 내민 붉은 싹들이 유레카를 외치던 아르키메데스보다도 더 벅차오르게 하였다. 나태한 마음에 죽비를 내리듯 화들짝 정신이 들게도 하였다. 그 땡볕 아래서도 살아남았고, 그 비바람, 그 폭설 아래서도 살아남았나니, 이 봄날의 귀환이 어찌 자랑스럽지 아니한가.

어제 아침 산책로에서는 다람쥐를 적어도 열 마리쯤은 본 것 같다. 얘네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천둥벌거숭이들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인지 함부로 길 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사람들 발소리에 후르르 숲속으로 달아나거나 우듬지 사이로 공중곡예를 펼쳤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과 유연한 줄무늬, 공기처럼 가벼운 몸짓이 얼마나 앙증맞고 귀여운지 사람마다 발걸음을 멈춘 채 행복한 구경꾼이 되었다.

아직 미결된 귀환도 있다. 돌아오지 않아서 여전히 설레며 기다리는 중이다. 작년 이맘때 산책로를 걷다가 길가 난간 틈으로 문득 작은 움직임을 포착했다. 뭐지? 반사적으로 몸을 굽혀 아래를 들여다봤더니, 와, 아기 오리 대여섯 마리가 바지런히 종종걸음을 치고 있는 거다. 앞장선 엄마 오리는 보무도 당당하였다. 탄탄한 가슴께와 뒤뚱거리는 걸음 속에는 모종의 위엄마저 서려 있었다. 엄마와 아기들의 그 해맑은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어미 오리가 서둘러 풀숲으로 숨어들었다. 아기들도 죽을세라 그 뒤를 따랐다. 풀숲은 금방 그들의 요새가 되었다. 아무 일도 없는 듯 햇살만 고요했다.

잠깐 사이 천국을 다녀온 듯, 어느 파라다이스에 불시착한 나그네인 듯 아릿한 행복감에 젖었다. 짧고 아쉬운 만남이었지만, 그보다 좋은 순간은 없지 싶었다. 너무 아름답고 좋아서 완전히 천국 같은 순간을 ‘파라다이스 빔’이라고 한다는데, 그 순간이야말로 응당 그렇지 싶었다. 생각만으로도 미소가 떠오르니, 봄날이 내게 안긴 최고의 선물이었음이 분명하다.

시간은 강물이 아니라 포도나무다. 직선으로 흘러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지를 치고 덩굴을 뻗으며 우리의 삶 곳곳을 휘감는다. 계절처럼 순환하고 기억처럼 되돌아온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인 채 나선형으로도 확장된다. 어느 때는 기어가고 어느 때는 날아가며, 뭉텅뭉텅 떨어져 버리거나 흔적 없이 증발해버리기도 하면서 우리를 맴돈다. 해마다 포도 열매 새로 열리듯 다시금 돌아와 우리를 위해 멈춘다.

지금 여기는 끝없는 귀환의 축제장이다. 다시 돌아오는 것들의 발자국이 크레바스처럼 번져가는 중이다. 대도시의 허황한 거리에도, 산골짜기 메마른 논밭에도 날마다 귀환의 바람이 불고 있다. 시시각각 무성해지는 새순들은 영원회귀의 신화를 입고 있다. 데메테르의 횃불을 치켜들고 ‘우리는 불멸이다’를 외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뻐꾸기 소리를 듣는다. 듣기에 따라서는 ‘호호호호’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흑흑흑흑’ 우는 것 같기도 하고, ‘홀딱 벗고’ 유혹하는 것도 같다는 검은등뻐꾸기의 네 마디 노래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는 정확한 네 음절의 전언(傳言). 어떤 스님은 ‘머리 깎고’ 정진하라는 소리로 들으셨다는데….

다시 돌아온 화두를 받아들고 봄날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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