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뒤안’이 있었다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5년 03월 31일(월) 22:00
시골집이다.

바지랑대 위 빨래가 봄 햇살에 졸고, 행랑채에는 두엄이 들녘으로 행차 준비 중이다.

여기저기 살피다가 무엇인가에 끌려 조붓한 ‘뒤안’으로 간다. 집 우측으로 난 뒤안길, 거기에는 내 몸에 익숙하고 낡은 것이 있고, 나를 따라온 늙은 어머니는 머위를 꺾거나 호박잎을 딴다.

뒤안에서 발밤발밤 텃밭으로 이어진 길에는 오래된 굴뚝이 있고, 해가 잘 들어오는 곳엔 장독이 옹기종기 앉아 있다. 장꽝 주변 텃밭에는 상추와 옥수수가 막 싹을 틔우고 채송화나 맨드라미가 철 따라 피고 진다. 땅을 깨운 것은 봄 햇살이지만 씨앗을 깨운 것은 어머니 손길이다.

초여름이 되면 장꽝 주변으로 봉숭아꽃이 무덕무덕 피었다. 누이 입술보다 더 연한 꽃은 다경이 손톱에서는 더 시붉었다.

그 해도 봉숭아꽃이 만발했다. 윗집 다경이는 그 꽃이 탐난다며 우리 집에 자주 들렀다. 그 애가 오면 나도 하던 일을 멈추고 봉숭아꽃을 땄다.

그날도 난 그 애와 멀찍이 떨어져서 봉숭아꽃 따기에 바빴다. 허리까지 자란 잎 사이에서 그 붉고 연한 꽃들을 따다 보면 다경이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꽃잎 몇 개면 될 터이지만 난 두 손 가득 따주고 싶었다. 가만한 바람에 다경이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렇게 흥뚱항뚱 꽃을 따던 어느 순간, 내 손에 무언가가 ‘뭉클’ 잡혔다.

그 애 손이었다. 난 깜짝 놀랐다. 봉숭아꽃을 따던 희고 고운, 아니 부드러운 다경이 손과 내 손이 만난 것이다. 너무 놀란 나머지 얼떨결에 나는 그 손을 놓지 못했고, 그 애 역시 엉거주춤 손을 되가져가지 못했다.

그 뒤 그 애는, 다시 우리 집도 봉숭아꽃도 찾지 않았다. 봉숭아꽃보다 더 붉게 물들어가는 그 애 얼굴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뒤안은 다경이와 얽힌 추억 못지않게 많은 것이 있다. 마냥모를 끝난 쟁기와 써레가 아버지 허리처럼 앙상하게 놓여있고, 멍석과 똥장군도 나락이 익을 때까지 서까래 밑에 걸려있다. 간혹 어머니는 장독을 여닫으며 할머니와 다투곤 했는데 그때마다 간장 맛도 고추장 맛도 맵고 짰다.

이승우의 뒤안은 어둡고 음침한 곳이다. ‘차꼬를 찬 남자’ 유년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는 금령의 공간이자 유혹의 공간, ‘생의 이면’은 그의 뒤안에 대한 기억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염상구가 숨어있는 곳도 뒤안이고, 정하섭이가 달아나는 곳도 뒤안 대밭이었다. 우리가 고흐를 좋아한 것은 어쩌면 그림보다 더 치열한 그의 생의 뒤안이 있어서인지 모른다.

항구나 식당의 뒤안은 좀 지저분하지만, 출항을 준비하는 공간이고, 환자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마음의 치유가 이루어지는 곳 역시 병원의 뒤안이다.

속세를 떠난 스님들이 본래 모습, 다시 속세로 돌아가는 요사체 역시 절의 뒤안이고, 아버지께 혼이 난 나를 어머니가 소곤소곤 달래주던 곳도 뒤안이었다. 어쩌면 숨바꼭질할 때, 넓은 앞마당을 두고 뒤안으로 달려갔던 유년의 뿌리가 거기여서인지 모른다.

앞만 있는 집도 없고 앞만 있는 사람도 없다. 누구에게나 웃음 못지않게 눈물과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간다. 사람으로 치자면 뒤안은 그런 애환이 숙성되는 곳이다.

앞이 양지라면 뒤꼍 뒤안은 그늘이고, 표준어가 앞마당이라면 사투리는 국어의 뒤안이다. 뒤안 또는 뒈안은 ‘집 뒤의 안쪽’인 전라도 토박이말인데, 깔도 덕석도 장꽝도 토재도 다 뒤안처럼 변방에 밀려나고 말았다.

전라도의 자투리 언어, 국어사전에 실어주지 않을지라도 우리에게는 너무 귀중한 생이 딱지처럼 엉킨 ‘뒤안’이라서 차마 버릴 수 없는 단어가 뒤안이다.

세상에 뒤가 없는 것은 없다. 드라마도 영화도 사투리가 중요하고, 사투리 역시 국어의 중요한 부분이다. 뒤의 안, 뒤안이 없는 사람은 집이 없고 심장이 없고 얼이 없는 사람이다.

뒤안도 다경이와의 추억도 햇볕 짱짱한 곳으로 끌어내고 싶은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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