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개와 인간의 풍경- 김향남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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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장편서사시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담고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10년이나 이어진 긴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데만도 다시 10년이 걸려 무려 20년 만에야 고향에 돌아가게 되는데, 그 여정 속에 펼쳐지는 이야기가 그야말로 만리장성이다.
사람을 한 명씩 잡아먹는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 사람을 동물로 바꿔버리는 마녀 ‘키르케’, 감미로운 노래로 선원을 유혹하는 바다의 요정 ‘세이렌’, 불사신으로 만들어줄 테니 부디 곁에 있어 달라 애원하는 ‘칼립소’, 해안에 떠밀려온 오디세우스를 구출해 준 이상의 여성 ‘나우시카’, 그리고 그의 아내 ‘페넬로페’. 그녀는 남편의 빈자리를 노리는 사내들의 구혼에 낮에는 베를 짜고 밤이면 다시 풀어 시간을 끈다. 시아버지의 수의를 다 짜게 되면 구혼을 받아들이겠다고….
‘오디세이아’에는 이처럼 별별 이야기들이 다 있으나 그중에서도 마음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 숱한 역경과 모험이 끝나고 마침내 고향집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수군거리는 소리에 그곳에서 자고 있던 개가 머리와 꼬리를 치켜들었다. 오디세우스가 기르고 가르쳤던 개 아르고스였다. 한때 사람들은 그 개를 데리고 사나운 염소나 토끼, 사슴을 몰았지만 지금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노새나 소가 문간에 쏟아놓은 거름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그 속에서 아르고스는 개벼룩이 들끓은 채 누워 있다가 오디세우스가 가까이 오자 곧 꼬리를 치며 양쪽 귀를 늘어뜨렸다. 그러나 주인에게 달려갈 기력이 더 이상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오디세우스는 에우마이오스 몰래 눈물을 닦았다. …아르고스는 오디세우스를 알아보고는 격정에 사로잡혀 온 힘을 다해 반기다가 그만 쓰러져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오디세우스는 드러낼 수 없는 감정을 숨기며 자신의 겉옷을 벗어 사랑하는 개를 덮어 주었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 데다가 거지꼴로 변장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기르던 개만은 유독 그를 알아보았다. 늙고 병들어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꼬리치며 반기는 모습이라니…. 인간과 인간 사이의 우정, 사랑, 그리움, 이런 것도 아름답지만 인간과 전혀 다른 종과의 우정, 사랑, 그리움, 이런 것은 어쩐지 더 뭉클하게 와닿았다. 어떻게 생판 다른 종과 그런 네트워킹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개와 인간은 어쩌다 그렇게나 돈독해졌을까.
개는 생물학적으로 늑대와 같은 종의 동물이라고 한다. 늑대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물이므로 개의 조상이 늑대인 것도 아니고 동종이므로 늑대에서 갈라져 나온 동물도 아니다. 개와 늑대는 서로 같은 동물이며 단지 늑대 본연의 야생성이 거세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제도적 인식 체계에서 구분된 개념으로 여겨질 따름이다. 그렇다면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을까?
개에게는 인간의 마음을 끄는 힘이 있다. 아련한 눈빛과 다정하고 친화적인 몸짓. 늑대들은 그런 매력으로 인간과 동반자 관계를 맺게 됐을 것이다. 뛰어난 후각과 예민한 청각으로 인간의 저장물을 지켜주고 위험을 알려주기도 했다. 점점 인간 곁에 머물게 된 그들은 사냥이나 여행길에 동행하기도 하고 추운 밤에는 체온을 나눠주기도 했다. 인간이 남긴 음식을 먹고 더러는 인간의 양식이 되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늑대는 인간의 가장 훌륭한 동반자가 되었다.
거리의 노숙자에게 개는 더 훌륭한 동반자처럼 보였다. 맵찬 바람 속 지붕도 없는 거리에 나앉아서도 그들의 관계는 변함없이 돈독해 보였다. 허름한 옷가지를 둘러쓰고 무연히 앉아 있는 모습은 오래된 풍경처럼 편안해 보였다. 체온을 나누고 영혼을 교감하며 풍찬노숙을 견뎌온 이들의 달관한 표정 같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 가장 충실하게 믿고 의지하는 사이임이 틀림없었다.
인간은 무릇 생명을 유지할 정도의 음식과 눕고 일어날 수 있는 정도의 공간과 몸을 감싸줄 수 있는 정도의 옷가지만 있으면 살아갈 수는 있다. 거기다 뭐라도 나눌 수 있고 함께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제법 행복한 삶이지 않을까. 굳이 같은 종끼리가 아니어도, 그렇지! 개라도 좋을 것이다. 개와 인간의 유대는 아득한 저 신화시대부터 이어져 왔으니 그 역사만큼이나 깊고 유구하지 않은가.
개와 인간이 나란히 있는, 인간과 개의 나란한 풍경이 따스하고도 서늘하다. 생김새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어느 무엇도 같다고 할 수 없는 종들이 어찌 저토록 ‘중한’ 사이가 되었을까. 땅거미 내리는 푸르스름한 저녁, 낯선 이국의 거리에서 새삼 다시 해보는 질문이다.
‘오디세이아’에는 이처럼 별별 이야기들이 다 있으나 그중에서도 마음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 숱한 역경과 모험이 끝나고 마침내 고향집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 데다가 거지꼴로 변장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기르던 개만은 유독 그를 알아보았다. 늙고 병들어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꼬리치며 반기는 모습이라니…. 인간과 인간 사이의 우정, 사랑, 그리움, 이런 것도 아름답지만 인간과 전혀 다른 종과의 우정, 사랑, 그리움, 이런 것은 어쩐지 더 뭉클하게 와닿았다. 어떻게 생판 다른 종과 그런 네트워킹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개와 인간은 어쩌다 그렇게나 돈독해졌을까.
개는 생물학적으로 늑대와 같은 종의 동물이라고 한다. 늑대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물이므로 개의 조상이 늑대인 것도 아니고 동종이므로 늑대에서 갈라져 나온 동물도 아니다. 개와 늑대는 서로 같은 동물이며 단지 늑대 본연의 야생성이 거세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제도적 인식 체계에서 구분된 개념으로 여겨질 따름이다. 그렇다면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을까?
개에게는 인간의 마음을 끄는 힘이 있다. 아련한 눈빛과 다정하고 친화적인 몸짓. 늑대들은 그런 매력으로 인간과 동반자 관계를 맺게 됐을 것이다. 뛰어난 후각과 예민한 청각으로 인간의 저장물을 지켜주고 위험을 알려주기도 했다. 점점 인간 곁에 머물게 된 그들은 사냥이나 여행길에 동행하기도 하고 추운 밤에는 체온을 나눠주기도 했다. 인간이 남긴 음식을 먹고 더러는 인간의 양식이 되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늑대는 인간의 가장 훌륭한 동반자가 되었다.
거리의 노숙자에게 개는 더 훌륭한 동반자처럼 보였다. 맵찬 바람 속 지붕도 없는 거리에 나앉아서도 그들의 관계는 변함없이 돈독해 보였다. 허름한 옷가지를 둘러쓰고 무연히 앉아 있는 모습은 오래된 풍경처럼 편안해 보였다. 체온을 나누고 영혼을 교감하며 풍찬노숙을 견뎌온 이들의 달관한 표정 같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 가장 충실하게 믿고 의지하는 사이임이 틀림없었다.
인간은 무릇 생명을 유지할 정도의 음식과 눕고 일어날 수 있는 정도의 공간과 몸을 감싸줄 수 있는 정도의 옷가지만 있으면 살아갈 수는 있다. 거기다 뭐라도 나눌 수 있고 함께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제법 행복한 삶이지 않을까. 굳이 같은 종끼리가 아니어도, 그렇지! 개라도 좋을 것이다. 개와 인간의 유대는 아득한 저 신화시대부터 이어져 왔으니 그 역사만큼이나 깊고 유구하지 않은가.
개와 인간이 나란히 있는, 인간과 개의 나란한 풍경이 따스하고도 서늘하다. 생김새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어느 무엇도 같다고 할 수 없는 종들이 어찌 저토록 ‘중한’ 사이가 되었을까. 땅거미 내리는 푸르스름한 저녁, 낯선 이국의 거리에서 새삼 다시 해보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