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추억으로 남는다 - 옥영석 농협경제지주 마트전략부장
2023년 11월 08일(수) 00:00
흐린 가을 하늘에 비가 내리던 주말, 가족들을 태우고 오랫만에 근교에 나갔다. SNS를 통해 전해오는 광주 상무지구 김치축제와 해남의 미남축제를 갈 수 없어 속이 쓰렸지만, 장대비를 피할 겸 요즈음 핫하다는 베이커리 카페에 들렀다.

빵집에 가면 늘 고르는 것이 고로케다. 본래 서유럽의 크로켓이 일본에 들어와 변형된 요리로, 감자를 으깨 쇠고기나 햄, 치즈, 파스타류니 갖가지 야채를 섞어 밀가루 반죽을 입힌 다음 튀겨낸 것이다. 프랑스, 스페인에서는 고기, 해산물, 채소 등을 넣은 동네 선술집 안주거리로, 이탈리아에서는 고기 내장에 쌀 옷을 입힌 아란치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벨기에에서는 새우를 넣어 만든 것을 1차 대전에서 군인들이 즐겨 먹어 보편화되었고, 네델란드에서는 송아지고기와 감자를 섞어 가장 대중적인 길거리음식이 되었다.

식구들은 어쩔 수 없는 촌스런 입맛이라고 놀려대지만 내가 늘 그 느끼한 빵을 집어 드는 데는 나름 사연이 있어서다. 고등학교 1학년, 기차로 한 시간 반을 달려 통학하던 내겐 방과 후엔 친구들과 놀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어느 날 방앗간 집 큰아들 일우라는 친구가 느닷없이 빵집을 가자고 성화였다. 군것질이라곤 교내 매점이나 학교 앞 분식집이나 들락거리던 터에 빵집이라니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따라 나섰다. 동생과 둘이 자취하던 그 친구는 인근에 사는 외할머니가 밥이며 빨래며 살림을 다해 주는데다 공무원 외삼촌이 용돈도 두둑이 주는 터, 전날 제과점에서 고로케를 먹어보니 그렇게 맛있더라는 것이다. 배고픈다리를 지나 학동 사는 친구와 셋이 난생 처음 들어가 본 전대병원사거리 제과점, 기대했던 고로케는 맛을 떠나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던 내겐 다졌다고는 해도 식감이 별로였던 데다, 잡채며 야채가 느글느글한 기름범벅이었기 때문이다. 여름내 풋고추에 된장만 찍어먹던 열 일곱 시골뜨기 입맛에 맞을 리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도 빵집에 갈 때마다 고로케를 집어 들고 또 집어든다. 이젠 제법 입맛에도 맞거니와 소에 든 내용물이 쇠고기인지, 햄인지, 크림과 고기소스나 잡채와 파스타류를 혀끝으로 구분해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자 내 손을 잡아끌던 어릴 적 친구의 마음이 빵가루보다 더 아삭거리기 때문이다.

팥죽을 먹을 때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칼국수 말던 모습이 떠오르는 걸 보면 음식은 곧 추억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가난한 집안 조카들 챙기느라 정작 당신 피붙이에게는 더 소홀했던 큰어머니는 라면을 끓일 때마다 늘 참기름을 몇 방울씩 떨궈주셨다. 참깨라면을 먹을 때마다 큰어머니의 많이 먹으라시던 목소리를 듣는 것 같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 넷에 대학생 조카 둘을 작은 방에 들여, 도시락 여섯 개를 싸면서도 늘 웃는 얼굴이던 사촌 형수님은 장어탕을 잘 끓이셨는데, 아무리 유명한 장어집에 가도 그 맛을 내는 식당을 찾을 수 없다. 목포의 명물 쑥꿀래보다 달콤한 음식은 천지에 넘쳐나지만, 좋아한다는 말 한번 못해 본 친구와 나눠먹던 그 아스라한 기억은 어떤 초콜릿, 어느 케이크도 소환해 오지 못한다.

음식은 먹을 때의 맛도 중요하지만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흘러도 남는 것은 그 음식을 먹는 동안 느꼈던 감정과 분위기이다. 어쩌면 음식이 가진 가장 빼어난 힘은 맛을 추억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나는 누구에게 그런 기억을 한번이라도 갖게 해 주었는지 모르겠다. 나만 먹고, 식구만 챙기고, 혼자 살기에 급급해, 친구와 후배들에게 자신만 아는 사람이었던 건 아니었는지 차가워지는 바람 못지않게 마음이 더 으스스해지는 늦가을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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