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옷’에 실려 간 억울한 죽음 없어야 - 송기동 예향부장·편집국 부국장
은폐된 진실 밝히고 명예 되찾아야
멈춰버린 군 의문사 진상 규명
2023년 10월 25일(수) 00:00
# “석식 후 개울에서 혼자 목욕하다가 쇼크로 인한 기도 폐쇄로 사망했다.”

1987년 7월, 군은 최전방 부대에서 갑자기 사망한 L상병의 죽음을 ‘사고사’라고 했다. 부검때 군의관은 고인의 가슴께에 있는 멍을 보고도 ‘심장마비’로 결론 냈고, 해당 부대는 상부에 ‘기도 이물 폐쇄에 의한 질식사’로 보고했다. 아들을 잃은 유족들은 군의 거짓말을 믿고 분루(憤淚)를 삼켜야 했다. 하지만 30여년 뒤 군(軍)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구타에 의한 타살’로 밝혀졌다. 한 선임병이 후임병들을 집합시킨 후 ‘얼차려’를 주며 L상병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린 게 원인이었다. 위원회에 L상병의 억울한 죽음을 규명해달라고 진정한 이는 고인의 동료 부대원 이었다.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에서 동원한 1공수 병력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기 위해 몰려왔다. 국방부 청사내 B2 벙커를 지키던 초병은 무장해제 하려는 반란군들에게 “우리 중대장의 지시없이는 절대 총을 줄 수 없다”며 저항하다 사살됐다. 초병은 영암 출신으로 광주에서 고교·대학을 다닌 고(故) 정선엽 병장이다. 반란군은 그의 죽음을 ‘계엄군 증가 인원과의 오인에 의한 총기사고’로 조작했다. 그의 의로운 죽음은 묻혀져 있었다. 고교 친구들이 그를 기리며 모교 교정에 소나무를 심었다. 2022년 4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는 마땅히 사망 구분을 순직에서 전사로 변경해 망인과 유가족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에 합당한 예우를 하여야 한다”고 결정했다.

대통령 직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최근 조사 활동을 종료했다. 2018년 9월 출범한지 꼭 5년만이다. 1948년 11월 이후 발생한 군내 사망사고 가운데 의문사가 제기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설치됐다.

위원회는 접수된 진정사건 총 1787건 가운데 1134건의 진상을 규명했다. 이 가운데 자해사망으로 규명된 사건이 943건, 사고사 314건, 병사(病死) 325건, 타살 59건으로 밝혀졌다. 특히 위원회 조사결과에 따라 12·12 반란군과 대치하다 목숨을 잃은 정 병장 사례처럼 ‘순직’에서 ‘전사’로 변경되기도 했다. 일반 병사 사망사건 1362건 중 이병(399건)과 일병(462건) 계급의 비중이 높았다. 사례집에 실린 사망사고는 공통적으로 구타와 빈인간적인 대우 등에서 비롯됐는데 군 지휘관들은 이를 자살·병사 등 개인의 잘못으로 은폐하고 책임을 회피했다.

그러나 아직도 군에서 의문사해 경위를 살펴봐야 할 사례가 3만여 건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위원회의 활동 기간 연장이 절실하다. 그렇지만 위원회 조사 기간을 연장하는 관련 법 개정안은 안타깝게도 국회 상임위를 넘지 못했다.

위원회는 5년간의 ‘종합활동 보고서’와 함께 부록으로 군사망사고 피해 사례집을 냈다. ‘나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제목을 붙인 피해 사례집에는 모두 27건의 사례가 실려 있다. 아! 그런데 사례집을 몇 페이지 넘기자마자 기자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도 가팔라졌다. 구타와 폭언, 얼차려 등 1980년대 군에서 직·간접적으로 겪은 트라우마가 다시 살아나는 듯 했다. 군 복무시절 가장 선임인 ‘왕고참’의 성향에 따라 내무반 분위기가 천당과 지옥 차이만큼 달라짐은 누구나 절감했을 것이다.

사례집에 나온 젊은 군인들은 어쩌면 옷깃이라도 스쳤을지도 모르는 친구 또는 선·후배나 다름없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병역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 입대한 그들이 왜 억울한 죽음을 맞아야 하는가. 2016년 3월, 입대한지 7개월밖에 되지 않은 한 청년은 혈액암이 의심됨에도 군 병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했다. 사후에 보인 국가보훈처와 국방부의 대처는 유가족들을 절망케 했다. 국가보훈처는 ‘재해 사망 군경’으로 판단해 유족의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거부했고, 국방부는 법원의 화해권고를 받아 들이지 않은 것이다.

지난 7월, 실종자 수색작전 중 발생한 해병대 1사단 채 일병 사망처럼 현재도 군 사망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 무기는 최첨단 장비로 발달하고 있는데도 이를 운용하는 군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 ‘푸른 옷’에 실려가는 청년들의 억울한 죽음은 없어야 하고, 그들의 명예는 회복돼야 한다. 국가는 부모에게 참척( 慘慽·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의 쓰라림을 안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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