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황경춘 (1924~2023) - 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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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31일 타계한 황경춘 씨는 격동기 한국 현대사를 삶 자체로 증언한 언론인이었습니다. 1957년 AP통신 서울지국 기자로 출발한 이후, 주간 ‘Time’ 서울지국 기자, ‘포춘’ 등 미국 잡지의 프리랜서 등을 거쳐 자유칼럼그룹의 필진으로서 올해 2월 마지막 칼럼을 쓰기까지 66년간 언론 외길을 걸었습니다.
1924년 갑자생이니 내년이면 100세인데, 국내 최고령 칼럼니스트는 아쉽게도 99세로 펜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2월 23일의 마지막 글이 ‘100세에 일기 쓰기의 의미’였으니 당신 자신은 올해가 100세라고 생각하며 생을 정리해온 게 분명합니다.
황경춘 기자는 어떤 분이었나. 우선 겸손하고 과묵했습니다. 나이 들면 말이 많아지고 매사 아는 척, 논평과 훈수를 하는 게 보통이지만 그분에게는 그런 게 전혀 없었습니다. 모임에서는 반듯하게 앉아 남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곤 했습니다. 한 이야기를 다시 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상과 시대에 대한 관심에서 배움의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어로 살아왔고 해방 후엔 영어로 일하다 보니 우리글이 서툴렀던 그분은 내가 한국일보에 재직 중이던 2006년에 칼럼을 읽고 메일로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그렇게 알게 된 걸 계기로 내가 공동대표인 자유칼럼에 2008년 1월부터 글을 쓰게 됐습니다. 글이 발표되기 전 ‘훈장님께’라는 제목으로 원고를 보내 감수와 수정을 부탁했는데, 아버지뻘 부집존장(父執尊長)인데도 학생처럼 늘 내게 공손하고 정중했습니다.
또 당신과 거의 동갑인 일본 월간지 ‘문예춘추’(1923년 창간)와 국내 영자신문을 구독해 일본과 해외의 상황을 누구보다 더 빨리 깊게 알고 있었고, 돋보기로 컴퓨터 화면을 읽으면서 뉴스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말 장·단 발음이 엉터리인 아나운서들, 일본 인명 표기가 잘못된 것 등을 기회 있을 때마다 지적했습니다. 투병 중이던 5월 중순에도 전화를 걸어와 외래어 외국어 표기 문제를 글로 다뤄보라고 권유했습니다. 나는 수시로 궁금한 것을 여쭙거나 일본어 번역을 부탁해 귀찮게 했습니다.
그분이 다른 언론인들과 판이한 점은 건강관리와 장수입니다. 몸을 돌보지 않는 음주와 과로가 자랑이었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철저한 자기관리로 일관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꼭 맨손체조를 하고 술은 입에 대는 정도, 식사는 소식(小食)을 했습니다. 특히 2018년에 상처를 하고도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려 노력하면서 어릴 때부터 불어온 하모니카로 가끔 기분을 전환했습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까지 일기를 썼습니다. 만 6세로 일본인 소학교에 입학한 뒤 쓰기 시작한 일기는 몇 번 중단됐지만, 20년 전 여생을 뜻있게 보내는 중요한 일과로 다시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글에 썼듯이 일기 쓰기는 죽음만이 중단시킬 수 있는 일거리로, 매일매일 삶을 깊이 반성하는 값진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끝까지 걱정한 것은 치매였습니다. 상처 후 자녀들과 함께 살게 되자 ‘자유로운 사생활’을 그리워하면서도 “돌보는 가족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는 피하고 근엄하게 삶을 마감하고 싶다.”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 걱정과 달리 정신은 끝까지 맑았고, 마지막 입원 기간에 잠깐 섬망 증상이 있을 때 글을 써야 한다면서 간병하는 따님에게 무엇인가 기사를 쓰라고 했답니다. 임종 이틀 전 “이제 그만 쉬고 싶다.”고 한 게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언론인으로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쉬지 않고 시대와 사회를 호흡해온 분다운 말이지만, 그 말을 전해 듣는 순간 마음이 몹시 아렸습니다.
사람은 가능하면 아주 오래 살아서 무엇인가 이웃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분의 삶은 겸손한 내공을 바탕으로 정직하고 아름다운 사회를 지향하며 살아온 한평생입니다. 언론인은 결코 느슨하면 안 되며 생각과 말이 늙거나 낡거나 글이 묽으면 안 됩니다. 언론인의 일은 죽어서야 끝납니다. 그야말로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췌 췌死而後已), ‘온몸으로 최선을 다하고 죽음에 이르러야 비로소 그만두는 일’이라는 걸 알려주고 그분은 길이 떠나갔습니다.
황경춘 기자는 어떤 분이었나. 우선 겸손하고 과묵했습니다. 나이 들면 말이 많아지고 매사 아는 척, 논평과 훈수를 하는 게 보통이지만 그분에게는 그런 게 전혀 없었습니다. 모임에서는 반듯하게 앉아 남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곤 했습니다. 한 이야기를 다시 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상과 시대에 대한 관심에서 배움의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어로 살아왔고 해방 후엔 영어로 일하다 보니 우리글이 서툴렀던 그분은 내가 한국일보에 재직 중이던 2006년에 칼럼을 읽고 메일로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그렇게 알게 된 걸 계기로 내가 공동대표인 자유칼럼에 2008년 1월부터 글을 쓰게 됐습니다. 글이 발표되기 전 ‘훈장님께’라는 제목으로 원고를 보내 감수와 수정을 부탁했는데, 아버지뻘 부집존장(父執尊長)인데도 학생처럼 늘 내게 공손하고 정중했습니다.
그분이 다른 언론인들과 판이한 점은 건강관리와 장수입니다. 몸을 돌보지 않는 음주와 과로가 자랑이었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철저한 자기관리로 일관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꼭 맨손체조를 하고 술은 입에 대는 정도, 식사는 소식(小食)을 했습니다. 특히 2018년에 상처를 하고도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려 노력하면서 어릴 때부터 불어온 하모니카로 가끔 기분을 전환했습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까지 일기를 썼습니다. 만 6세로 일본인 소학교에 입학한 뒤 쓰기 시작한 일기는 몇 번 중단됐지만, 20년 전 여생을 뜻있게 보내는 중요한 일과로 다시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글에 썼듯이 일기 쓰기는 죽음만이 중단시킬 수 있는 일거리로, 매일매일 삶을 깊이 반성하는 값진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끝까지 걱정한 것은 치매였습니다. 상처 후 자녀들과 함께 살게 되자 ‘자유로운 사생활’을 그리워하면서도 “돌보는 가족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는 피하고 근엄하게 삶을 마감하고 싶다.”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 걱정과 달리 정신은 끝까지 맑았고, 마지막 입원 기간에 잠깐 섬망 증상이 있을 때 글을 써야 한다면서 간병하는 따님에게 무엇인가 기사를 쓰라고 했답니다. 임종 이틀 전 “이제 그만 쉬고 싶다.”고 한 게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언론인으로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쉬지 않고 시대와 사회를 호흡해온 분다운 말이지만, 그 말을 전해 듣는 순간 마음이 몹시 아렸습니다.
사람은 가능하면 아주 오래 살아서 무엇인가 이웃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분의 삶은 겸손한 내공을 바탕으로 정직하고 아름다운 사회를 지향하며 살아온 한평생입니다. 언론인은 결코 느슨하면 안 되며 생각과 말이 늙거나 낡거나 글이 묽으면 안 됩니다. 언론인의 일은 죽어서야 끝납니다. 그야말로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췌 췌死而後已), ‘온몸으로 최선을 다하고 죽음에 이르러야 비로소 그만두는 일’이라는 걸 알려주고 그분은 길이 떠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