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화해 - 유제관 편집담당 1국장
2023년 02월 24일(금) 00:30
광주 사람들은 잊지 못한다. 뜬눈으로 지새운 1980년 5월 27일의 그 긴 새벽을. 세 시가 되자 금남로에 두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목소리가 잦아들자 공수부대의 작전이 시작됐다. 총소리가 광주의 새벽을 삼켰다. 도청에 남은 사람은 300여 명. 저항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한 시간 반 정도. 그러나 가족과 이웃 그리고 친구들을 도청에 남겨 두고 집에서 총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나긴 시간이었다. 그 새벽을 보낸 다음 광주 사람들에게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것이 생겼다.

동이 트자 참혹한 현장에 군가가 울려 퍼졌다. 도청 앞 분수대 주변에 모인 공수부대원은 25명 정도. 두 개 중대 규모였다. 이들은 특전사가(歌) ‘검은 베레모’를 마치 승전가처럼 불렀다. “보아라! 장한 모습 검은 베레모, 무쇠 같은 우리와 누가 맞서랴….”

올해는 5·18민주화운동 43주년이 되는 해다. 그런데 지난 19일 광주에서 또다시 ‘검은 베레모’가 울려 퍼질 뻔 했다. 특전사동지회원 150여 명이 광주에 모여 특전복에 군홧발로 군사 작전 하듯 5·18묘역을 기습 참배하고, 5·18기념문화센터에서 일부 5·18 단체와 함께 ‘용서와 화해를 위한 대국민선언’ 행사를 개최했다. 선언문은 ‘5·18 당시 계엄군은 상부의 명에 복종이 불가피했고, 이후 오랜 정신적 육체적 아픔을 겪고 있기 때문에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특전사동지회 대표는 “광주에서 질서 유지의 임무를 맡았던 군 선배 여러분들의 헌신과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고도 했다. 광주 학살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계엄군도 명령에 따른 것이니 피해자라는 주장이다. 계획했던 ‘검은 베레모’ 제창은 시민단체의 반대로 무산됐다.

반성과 사죄 없는 가해자의 고통 호소는 또 다른 2차 가해다. 섣불리 전두환에 면죄부를 준 것처럼 침묵하는 가해자에 피해자가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진상 규명과 가해자의 사죄 등 절차와 과정을 생략한 용서와 화해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유제관 편집담당 1국장 jkyou@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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