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과 편견 - 황성호 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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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믿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모습에서 교만함, 빈정거림, 못마땅함, 우월 의식, 허영심, 거들먹거림 등을 보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믿고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서 사회성은 물론 공동체성이나 연대성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때론 이들의 행태가 어리석기 짝이 없다. 한 번도 우물 밖을 나가보지 못했기에 드넓은 대양이 얼마나 넓고 깊으며 심오한지 모른다. 그래서 이들이 왜 오만방자한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그 이유는 자신이 믿고 있고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데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말을 하기보다 들어주는 경청의 자세가 오히려 지혜롭게 보일 때가 많다. 최근 한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요즘, 많이 가진 사람들과 많이 배웠다 하는 사람들에게서 겸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 같아” 많이 안다고 자부하며 교만한 사람들과 많이 가졌다고 유난 떠는 오만한 사람들은 왜 겸손하지 못한 것일까? 교만하고 오만을 떠는 이들의 결과는 어리석음인데 왜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까?
마르코 복음 6장에서 예수는 고향을 방문하게 된다.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이 자신을 만나고 반응했던 모습을 예수는 마르코 복음 6장 4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은 환호하고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정작 예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고향 사람들은 정반대의 상황을 연출한다. 예수를 보고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6장 3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왜 이런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고향 사람들의 내면에서 어떤 생각이 작용하고 판단을 내린 것일까?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자부했던 것 같다. 어쭙잖은 경험으로 예수를 가두려고 했던 것이다. 이는 큰 착각이고 어리석기까지 한 판단이다. 결국 예수는 고향에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않으셨다. 자신들의 판단은 편견으로 바뀌어 버렸고 어떤 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우리 지역에 이주민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우리는 다양성을 이야기한다. 다양성을 이야기하지만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고인 물은 결국 썩는다’는 말이 있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갇힌 사회는 변화되기 어렵다. 변화되지 못하는 사회, 고착화되어 어떤 새로운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한낱 실낱 같은 지식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우월함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모습은 항상 못마땅하게 여기고 빈정거리며 비아냥거릴 뿐이다.
‘못마땅하게 여기다. 빈축을 사다’는 Escandalizar(에스칸달리사르)라는 스페인어 동사가 떠오른다. 스페인어 성경에서 예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부분에도 쓰이는 단어다. 이 동사의 명사형은 Escandalo(에스칸달로)이며 뜻은 큰 소동, 난장판, 빈축과 물의, 악평, 품행으로 단정치 못함을 뜻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어의 Scandal(스캔들)이다. 우리 관계에서 소동을 일으키고 빈축거리며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 모습,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을 의미한다.
서로 믿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감각과 생각 그리고 지식을 통해서 만들어진 틀, 곧 내 판단이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판단을 가장한 편견이기 때문이다. 결국 장애를 일으키고 곤란하게 하며 옳은 일까지도 방해하게 된다. 이런 상황들이 주위에서 자주 벌어진다. 그래서 자신이 믿고 있는 것과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떻게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는 편견을 막아 주는 장치가 있다. 그것은 바로 경청과 기다림이다. 급변하는 세상은 빨리 말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재촉한다. 하지만 그릇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편견을 이겨내려면 말하기보다 듣는 것이 더 유리하다.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자부했던 것 같다. 어쭙잖은 경험으로 예수를 가두려고 했던 것이다. 이는 큰 착각이고 어리석기까지 한 판단이다. 결국 예수는 고향에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않으셨다. 자신들의 판단은 편견으로 바뀌어 버렸고 어떤 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우리 지역에 이주민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우리는 다양성을 이야기한다. 다양성을 이야기하지만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고인 물은 결국 썩는다’는 말이 있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갇힌 사회는 변화되기 어렵다. 변화되지 못하는 사회, 고착화되어 어떤 새로운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한낱 실낱 같은 지식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우월함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모습은 항상 못마땅하게 여기고 빈정거리며 비아냥거릴 뿐이다.
‘못마땅하게 여기다. 빈축을 사다’는 Escandalizar(에스칸달리사르)라는 스페인어 동사가 떠오른다. 스페인어 성경에서 예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부분에도 쓰이는 단어다. 이 동사의 명사형은 Escandalo(에스칸달로)이며 뜻은 큰 소동, 난장판, 빈축과 물의, 악평, 품행으로 단정치 못함을 뜻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어의 Scandal(스캔들)이다. 우리 관계에서 소동을 일으키고 빈축거리며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 모습,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을 의미한다.
서로 믿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감각과 생각 그리고 지식을 통해서 만들어진 틀, 곧 내 판단이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판단을 가장한 편견이기 때문이다. 결국 장애를 일으키고 곤란하게 하며 옳은 일까지도 방해하게 된다. 이런 상황들이 주위에서 자주 벌어진다. 그래서 자신이 믿고 있는 것과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떻게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는 편견을 막아 주는 장치가 있다. 그것은 바로 경청과 기다림이다. 급변하는 세상은 빨리 말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재촉한다. 하지만 그릇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편견을 이겨내려면 말하기보다 듣는 것이 더 유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