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혁신학교- 김진구 행복학교포럼 대표
2023년 01월 18일(수) 00:45
이름은 상징성이 있다. 지향점을 나타내기도 한다. 어떤 정책이나 사업의 명칭이 주는 의미는 크다. 이름값을 하는 경우가 있고, 이름만 팔기도 한다. 명칭은 본질을 표상하기도 하지만 그럴듯하게 포장재로만 쓰이기도 한다.

소설가 김훈의 문장은 빠르고 직선적이다. 이순신, 남한산성, 안중근을 꿈틀거리게 한다. 그가 쓴 에세이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노량 남해도에 이락사(李落祠)라는 사당이 있다. 이순신이 바다로 떨어져 죽은 사당인데, 그 이름도 참 이순신답다. 아무런 수사학이 없고 떨어질 ‘락’ 자를 써서 이가 떨어진 바다라는 뜻이다. 난 전국 사당 이름 중에서 이락사가 제일 잘 지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일속산방’(一粟山房)이란 명칭을 좋아한다. 강진 유배지에서 다산이 제자로 삼은 황상(黃裳)의 초당이다. 평생 글을 읽고, 시를 썼는데 머문 곳은 일속이란다. ‘일속’은 좁쌀(조) 한 톨이다. 남루와 누옥에 기댄 겸손과 낮춤이다. 세상 이치의 은유가 은근하다.

요새 우리 사회에 굴러다니는 ‘깡통 전세’란 말은 어떤가. 가난한 인생들이 깡통처럼 거리에 내팽개쳐진 느낌이다. 비어서 찌그러지고, 구석지에서 녹슬고, 여기저기서 채인 종말 같은 단어다.

2010년부터 시작한 광주시교육청 민선 3기는 12년이었다. 긴 세월 교육감의 핵심 사업 중 하나가 ‘빛고을 혁신학교’였다. 이름하여 가히 혁명적으로 새롭게 만들겠다는 의미다. 교육 도시, 광주에 있는 학교의 구태를 벗기겠다는 것이다. 처음 혁신학교란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름의 무게 때문이었다. 10년이 넘도록 운영했으니 팍팍한 숫자놀음 같지만 이제 내막을 공유해 보자. 혁신학교란 간판이 이락사나 일속산방 같은지 아니면 깡통 전세인지 말이다.

혁신학교는 2011년, 초등학교 2개교와 중학교 2개교로 시작했다. 새로운 학교 문화 조성, 전문적 학습 공동체 구축, 학부모 참여와 지역사회 협력 등이 주요 활동 내용이다. 한번 지정되면 4년간인데 2년마다 중간 평가를 받지만 도중에 또는 4년 후 재신청에 탈락한 학교는 없었다. 그래서 12년간 계속하고 있는 학교도 있다.

2022학년도 현재 초중고 66개 학교가 지정되었다. 320개 학교 중에 20%이다. 66개교를 학교 급별로 보면 초등학교 40개교, 중학교 19개교(모두 공립), 특성화고 4개교(모두 사립), 일반계고 1개교(개교 때 지정), 특수학교 2개교(공립)이다. 초중학교는 사립이 없는데, 특성화고는 여상고 3개교와 공업계 1개교 모두 사립이다. 일반계 고등학교는 1개 학교인데 개교와 함께 미리 혁신학교로 지정되어 문을 열었을 뿐 그 외 공사립 인문계는 없다. 존중과 배려, 소통과 참여로 공교육 정상화를 창출하고자 하는 혁신학교에 대다수 학교가,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가 왜 신청하지 않았을까?

학교 문화와 수업 개선 등 상당한 성과가 있었고, 지금도 혁신학교 운영에 애쓰는 교직원들의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하지만 교직원의 50% 동의와 일정 요건을 갖추면 혁신학교로 지정해 주는데도 이 정도에 머물렀다는 것은 실패한 정책이다. 교사 초빙, 유보, 직원 추가 등 인적 지원에, 3천만 원에서 5천만 원까지 예산을 주는데도 왜 기피했을까.

시범적으로 운영했으면 평가를 거쳐 혁신학교의 장점을 다른 학교로도 일반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광주시 모든 학교의 재학생, 학부모, 지역사회가 혜택을 보는 것이다. 소수의 학교에 12년간, 400억 원 가까이 쏟아부었는데, 담장 하나 사이인 그 옆 차별받은 학교는 무슨 학교라고 불러야 하는가.

임기 내내 20% 그들만의 리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꺼리는 교원·학부모가 많아서 2023년에 새로 신청한 혁신학교는 없다. 혁신학교와 ‘학교 업무 정상화’ ‘담임 업무 제로화’란 너절한 간판만 남긴 채 광주 교육은 깡통 전세처럼 되었다.

민선 4기 광주시교육청의 핵심 정책은 ‘자치 학교’다. 학교 자치 실현을 위한 새로운 모델이다. 8개 주제 중에서 자유롭게 신청하면 1000만 원에서 최대 3000만 원을 지원하며 1년 단위로 운영한다고 한다. 교육청은 지원하되 최대한 간섭하지 않는다는 방침으로 107개 자치 학교가 새 학기부터 출항한다. 끼리끼리 혁신학교가 아닌 더불어 자치 학교가 되어 광주 교육에 새로운 변화와 도약의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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