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부족하고 불편해도- 황성호 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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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만족을 느꼈고, 부족한 것에서 감사함을 잊지 않았으며, 가진 것이 얼마나 되는지 보다 작은 소유에도 불구하고 나누는 것에 소홀하지 않았었다. 칠레의 빈민가에서 6년 동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그리고 범죄자들의 소굴로 불리던 지역의 이웃들과 살 때, 느꼈던 감정과 삶이었다. 이 삶을 습관화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다. 아끼려고 다짐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이곳의 삶이 그랬었다. 많은 것이 없던 곳이었고, 항상 있어도 부족한 곳이었지만 작은 것에도 만족했었고 나눔에 있어서 소홀하지 않았던 빈민가 사람들의 삶이었다.
가끔씩 기억을 되새기면,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웃으며 경쾌한 말로 서로를 반겼던 칠레 빈민가 친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빈민가의 한 본당 사제관에 들어왔을 때는 내 안에 무언가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비워냄으로써 채워졌고, 낮춤으로써 높아졌으며, 조건 없이 사랑했고 희생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내 안에 가득 찼던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행복과 기쁨과 즐거움이었다. 우리는 무엇으로 인해 기쁨을 얻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행복한 삶의 방법을 알고 있다. 소유와 독점으로는 우리 삶에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고 채울 수도 없다. 나눔과 공유가 서로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애써 부정하고,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처럼 끝없는 나락을 향하여 힘차게 내달릴 뿐이다. 안달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절대 놓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하고 힘쓰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칠레에서만 쓰는 스페인어 격언이 떠오른다. “Mano de guagua”(마노 데 와와)라는 칠레에서만 쓰는 표현으로 이기적인 사람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직역하면 갓난아기가 손가락을 절대 펴지 않고 꽉 쥐고 있다는 의미이다. 의역하면 철면피 같고 절대 가진 것을 나누지 못하는 욕심 많은 스크루지의 모습으로 대변되는 말이다. 또한 자신의 소유와 모아 놓은 재물만 바라보다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마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쓰이는 말이다. 눈 앞에 보이는 재물에 눈이 먼 사람들의 결과는 불행했고, 자신이 어리석었던 것을 인지하는 순간 이미 그 늪을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어떤 한 인간에게서, 또는 어떤 한 집단에서도 볼 수 있다.
최근 지인의 초대로, 광주 동구에 있는 꽤 유명한 한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수많은 반찬들과 함께 굉장히 맛깔스런 음식들이 차려졌었다. 네 명 이상이 함께 식사를 해도 모자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식사 후 자리에 일어나려는데, 음식이 너무 많이 남았으며, 어떤 반찬은 그 위에 뿌려진 깨도 그대로인 채 손도 대지 않았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사제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한 내 모습이 너무나 어이없고 거짓된 모습이었다. 맛있게 차려진 음식을 먹고 나왔지만 맛을 느끼기 보다는 불편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유통기한이 훨씬 지난 라면 한 개와 마지막 남은 김치 한 조각을 정확하게 자로 재 둘로 나누어 먹었던 칠레 선교사의 삶이 떠올랐다. 두 건장한 사제가 한 개의 라면과 한 조각의 김치를 나눠먹는 것이 처량해 보였지만, 이때 먹었던 라면과 작은 김치 한 조각이 너무나 맛있었던 기억이다. 부족했지만 감사했고 불편했지만 너무나 행복했었다.
넘쳐나는 세상인 지금, 만족하지 못하여 부족한 것은 꼭 채워야 하고 불편한 것은 절대 참을 수 없으며 과도한 소비의 주체가 되고 있는 것이 ‘나’가 아닐까? 의문을 던져 본다. 우리는 나눔을 통해 충분히 서로가 행복할 수 있고, 기다림을 통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으며, 조건 없는 사랑을 통해 서로를 안전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가 되는 이유는 왜일까? 행복으로 가는 길을 붙잡고 있는 탐욕이라는 덫을 풀어 내자. 조금 부족하고 불편하면 어떤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이런 우리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칠레에서만 쓰는 스페인어 격언이 떠오른다. “Mano de guagua”(마노 데 와와)라는 칠레에서만 쓰는 표현으로 이기적인 사람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직역하면 갓난아기가 손가락을 절대 펴지 않고 꽉 쥐고 있다는 의미이다. 의역하면 철면피 같고 절대 가진 것을 나누지 못하는 욕심 많은 스크루지의 모습으로 대변되는 말이다. 또한 자신의 소유와 모아 놓은 재물만 바라보다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마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쓰이는 말이다. 눈 앞에 보이는 재물에 눈이 먼 사람들의 결과는 불행했고, 자신이 어리석었던 것을 인지하는 순간 이미 그 늪을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어떤 한 인간에게서, 또는 어떤 한 집단에서도 볼 수 있다.
최근 지인의 초대로, 광주 동구에 있는 꽤 유명한 한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수많은 반찬들과 함께 굉장히 맛깔스런 음식들이 차려졌었다. 네 명 이상이 함께 식사를 해도 모자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식사 후 자리에 일어나려는데, 음식이 너무 많이 남았으며, 어떤 반찬은 그 위에 뿌려진 깨도 그대로인 채 손도 대지 않았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사제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한 내 모습이 너무나 어이없고 거짓된 모습이었다. 맛있게 차려진 음식을 먹고 나왔지만 맛을 느끼기 보다는 불편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유통기한이 훨씬 지난 라면 한 개와 마지막 남은 김치 한 조각을 정확하게 자로 재 둘로 나누어 먹었던 칠레 선교사의 삶이 떠올랐다. 두 건장한 사제가 한 개의 라면과 한 조각의 김치를 나눠먹는 것이 처량해 보였지만, 이때 먹었던 라면과 작은 김치 한 조각이 너무나 맛있었던 기억이다. 부족했지만 감사했고 불편했지만 너무나 행복했었다.
넘쳐나는 세상인 지금, 만족하지 못하여 부족한 것은 꼭 채워야 하고 불편한 것은 절대 참을 수 없으며 과도한 소비의 주체가 되고 있는 것이 ‘나’가 아닐까? 의문을 던져 본다. 우리는 나눔을 통해 충분히 서로가 행복할 수 있고, 기다림을 통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으며, 조건 없는 사랑을 통해 서로를 안전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가 되는 이유는 왜일까? 행복으로 가는 길을 붙잡고 있는 탐욕이라는 덫을 풀어 내자. 조금 부족하고 불편하면 어떤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