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충장로 우다방, 우체부와 러브레터] 소식을 전하고, 만남을 잇고
1913년 개설 ‘충장로 우체국’ 70년대 중심상권 자리매김
수많은 편지 ‘하나의 공동체’…‘만남의 광장’으로 더 유명
시인 네루다와 우체부 우정 그린 영화 ‘일 포스티노’ 등 눈길
2022년 04월 20일(수) 02:30
1913년 문을 연 광주우체국은 약속 장소로 애용되며 ‘우다방’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980년 오월 현장을 지켜보고, 수많은 이들의 사연을 실어날랐을 우체국은 지금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체부와 얽힌 얘기는 우리들 유년 시절 빼놓을 수 없는 레퍼토리. 가슴에 사랑이라는 단꽃이 필 때쯤 “한 장 말고 두 장이요” 우표를 붙인 연애편지로 그리움 반 보고픔 반 나누지 않은 이가 어디 있으랴. 우체부가 가져온 세상의 모든 소식이나 소문은 마을을 통째 달구기도 했었다. 산업의 발달에 맞춰 전화기, 라디오, 텔레비전이 속속 들어오고 요샌 손전화기에 인터넷 메일 시대. 우체부의 느리디느린 빨강 자전거 배달 대신 총알 배송 택배의 시대가 되었다. 우리 모두 은행 아니고 ‘은행알’을 털 때 우체부는 빨간 우체통을 도맡아 털었지. 길 가다 발에 챌 정도로 많던 우체통도 보기 힘들어졌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갸우뚱하다 우체통에 쓰레기를 집어넣는 녀석들도 있다덩만.

지난달 꾹꾹 눌러쓴 연필 글씨로 화가 임옥상 샘이 손편지를 보내주셨어. “오미크론, 대선, 우크라이나 전쟁, 울진 산불... 참으로 수상한 시절입니다. 그럼에도 봄날은 오겠지요. 꽃은 피겠지요. 축복의 봄날 꽃그늘 아래 다정한 벗들과 아름다운 꿈꾸며 우정으로 흠뻑 취하고 싶습니다...” 답을 못하고 있다가 신보 음반이 나와설랑 챙겨 보내드리고자 아랫동네 수북우체국에 들렀는데, 마침 점심시간. 아예 셔터를 내리고 식사를 하시나 봐. 광주 나가는 김에 충장로 우다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고딩 시절 때부터 나는 우다방 앞에 가끔 출몰하는 펭귄 무리 중 하나였지. 오늘은 노부부가 손을 꼭 쥐고서 걷고 있더군. 벚꽃이 강물을 뒤덮고 흐르듯 사랑이 흐르는 거리 풍경은 여전하였다.

#터줏대감 오래된 가게, 버틴 것에 감사 인사

우다방은 과거엔 활쏘기 하던 터란다. 1913년에 이르러 우체국이 들어섰다지. 1970년대 충장로는 광주의 중심 상권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인파들 속에서 당신과 만나는 약속 장소로 애용되었다. 그래 얻은 별명이 ‘우다방’. 다방처럼 쉽게 만날 수 있는 자리. 만남은 우리 공동체를 도탑게 살찌웠다. 지금은 주변 상권이 시들거나 변했고, 근처 명소였던 삼복서점은 폐업, ‘25시 음악사’는 한갓진 골목으로 이삿짐. 그나마 궁전제과는 터줏대감 빵집이다. 젊은이들이 찾는 모던한 빵집보다 나는 이런 구식 빵집이 맘에 들어. 케이크나 식빵의 맛보다 오래된 로고가 박힌 포장지가 외려 생의 단맛을 느끼게 한다. 오랜 날 남아있어 준 추억의 장소나 옛 상표들은 그저 버틴 것만으로 애썼다고,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려야 한다.

전에 보이지 않던 운세 족집게 뽑기 가게가 우다방 앞을 차지하고 있더군. 운명론에 빠진 점술, 미신에 혹하는 반지성의 시대상만 같아 움찔하게 되더라. 운세 점집 가게가 들어서고 뒷골목엔 타로나 궁합 따위를 봐주는 가게들도 즐비해. 차라리 불확실한 사랑을 돕는 방편으로다가 ‘연애조작단’이 차린 가게들이라면 싶었다. 그래봤자 어린 연인들의 소매를 당기는 귀여운 푼돈들의 정류장. 우다방 앞으로 휴가 군인이 친구들이랑 해찰부리며 걷다가, “여친이 생길지 운세나 함 봐볼까?” “군발이가 무신 놈의 운세. 사고치지 말고 조용히 귀대나 해라이” 그래그래. 친구 말 들어라잉~

오월 모란이 뚝뚝 떨어지던 날, 그날 우다방 앞은 어땠을까. 군인들의 북새통, 창검을 장착하는 소리와 무서운 고함들, 쫓기는 처절한 아우성은 사방에 흩날렸으리라. 우체부들은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워 바짝 묶고, 다급한 연애편지들도 오래도록 우체국 창고 속에 가둬지는 신세였겠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원작인 영화 ‘일 포스티노’를 떠오르게 하는 칠레의 발파라이소는 네루다가 머물며 시를 썼던 곳이다.
영화 ‘일 포스티노’의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고, 파블로 네루다 시인의 시를 읊조리곤 해야 맞을 청춘들에게 참말 가혹한 시대가 아닐 수 없었다. 언젠가 남미 칠레하고도 발파라이소란 동네엘 갔었지. 네루다가 머물던 해안가 도시. 바다와 배가 보이는 목포 어디나 아니면 방송국 뾰족탑이 있는 월산동 달동네 풍경 같은 가파른 언덕과 계단들. 아센소르(ascensor)라 불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 산정에 네루다가 살던 집이 기다리고 있더군.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후보였던 영화 ‘일 포스티노’는 안토니오 스카르메타가 쓴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원작이다. “나는 그때 신문사의 문화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었어요”로 시작하는 책은 망명 시인 네루다에게 소식들을 나르던 우체부 마리오의 이야기다. 사랑에 빠진 우체부에게 네루다는 ‘연애편지, 시 쓰는 법’ 따위를 가르쳐준다. 시인 네루다는 해변가 마을에 보통 집들을 두었는데, 발파라이소 말고도 이슬라 네그라에 창작공간을 두었다. 시인은 매일 부지런히 글을 썼다. ‘내일 피어날 모든 꽃은 오늘 심은 씨앗 속에 있다’는 말처럼 날마다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 엽서라도 썼다. 그리고 우체부는 꼬박꼬박 원고와 편지들을 도시 바깥으로 실어 날랐다.

#‘MOMA’서 전시회 파리의 우체부 루이비뱅

충장로 우체국, 우다방을 거쳐간 수많은 사연들은 다 어떻게들 되었을까.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우편물을 나르던 우체부들은 어떤 사연들로 물들며 세월을 지나왔을까. 프랑스 파리엔 ‘루이 비뱅’이란 우체부 겸 화가가 살았다. 비뱅은 42년간 파리의 우체부로 근무했지. 퇴직 후 평소 품고 있던 꿈 ‘그림 그리기’에 매달렸다. 마침 집이 몽마르트 언덕이라서 완성한 작품을 집 앞 담장에다가 보라고 내다 놓았어. 행인들은 비뱅의 소박하고 담백한 그림에 매료되었다. 마침 그 거리를 걷던 화상 빌헬름 우데의 눈에 든 비뱅의 그림은 세상에 알려졌다. 급기야 뉴욕현대미술관 모마를 비롯 전세계에 전시를 갖게 되었지.
칠레 발파라이소의 시민 네루다 동상 앞에 선 임의진 시인.
네루다를 흠모했던 우체부 마리오의 얘기처럼, 비뱅은 뤽상부르 미술관을 즐겨 다니며 자연주의 화가 카미유 코로와 사실주의 화풍으로 이름을 날린 귀스타브 쿠르베를 연모했다. 우체부 비뱅은 ‘서툴러 배나 자연스럽고 신비로운 그림’을 낳을 수 있었지. 만약 그가 네루다를 만났다면 화가 대신 시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농구선수 카멜로 앤서니는 이런 말을 했다지. “아침마다 당신에게 두 가지 선택이 놓인다. 계속 잠자면서 꿈을 꾸는 것. 아니면 일어나서 그 꿈을 뒤쫓아 가는 것.” 소설 속 우체부 마리오와 현실 속 파리의 우체부 비뱅은 그 꿈을 뒤쫓았던 인물들. 가슴으로만 품은 사랑은 짝사랑일 뿐. 러브레터 편지를 쓰고 부치는 사람만이 사랑을 얻게 되리라. 그러고 보니 ‘일 포스티노’ 말고 일본 영화 ‘러브 레터’도 사랑과 소통의 이야기렷다. 영화 러브 레터는 다시보기를 해도 질리지 않는다. ‘곱씹어보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내 영화’가 되는 법. 요즘 영화들은 너무 자극적이고, 그래서 양은냄비처럼 쉽게 식고 잊히는 것 같아. 이와이 ㅅㅠㄴ지의 원작소설도 순하고 웅숭깊다. 소설엔 이런 편지가 담겼다. “감기는 나으셨나요? 오늘 집에 가는 언덕길에서 벚꽃 봉오리가 부풀어 있는 걸 보았어요. 여긴 벌써 봄이 오려 한답니다.” 세상을 떠난 연인에게 보낸 러브 레터는 영화음악과 함께 오래도록 순하고 따순 여운을 남겼다.

소포를 부치고 근처 지하에 있는 중고서점에 들렀는데 시집 코너에 손이 간다. 언젠가 이 골목을 지나는데 담양이 고향인 시인 선배를 더럭 만났다. “샘! 여긴 무슨 일이시랍니까?” “네루다 시 공부하는 모임이 있는데 싸목싸목 갈치고 있답니다.” 광주에 네루다를 공부하는 모임이 있다고 그러셨지. 시를 공부한다면, 네루다는 첫 단추 첫출발로 그만이겠다. 김남주 시인도 감옥에서 번역하여 읽었다는 네루다. ‘은박지에 새긴 사랑’이라는 번역시집이 그렇게 나왔다지.

수많은 편지들을 주고 받으며 우리 공동체는 숱한 사연들로 엮였다. 저마다의 사연은 우릴 물들였으며 ‘하나의 공동체’로 견인해왔다. 다시금 그런 시절이 올 수 있을까.

네루다의 시집을 선물로 보내온 친구가 있다면 당신도 시인으로 물들 수 있겠다. 오, 꿈이런가. 우체부가 시집을 들고서 집집마다 찾아가는 꿈. 소설에서처럼 그가 정성껏 녹음해온 봄날의 모든 소리들이 바큇살 구르는 소리에 매달려 구석구석 퍼져나가는 꿈. 한 소절 한 음절 모두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우리들의 인생을 휘감고 있다.

임의진 시인
임의진

시인. 화가. 사진도 찍는다. ‘참꽃 피는 마을’,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여행자의 노래 1-10’, ‘심야버스’ 등의 수필집, 시집, 음반 등을 펴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등에 종종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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