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한의 74년, 해원(解원)은 아직 멀다-송기동 문화2부장 겸 편집부국장
2022년 01월 25일(화) 23:30
“… 그러고 나자 그(주민)는 자백을 한 다른 사람 전부와 똑같이 운동장 저쪽에 있는 호(壕)속에 처넣어지고 그곳에서 총살되었다. 이름도 죄명도, 누가 심문하고 누가 사형을 집행했는가도 기록되지 않고 그렇게 소멸되었다.” 미국 ‘라이프’(LIFE)지(誌) 특파원 칼 마이던스(1907~2004)가 기록한 민간인들의 즉결 처형 모습이다. 그는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0월 26일, 순천 농림학교에서 진압군들에게 처형당하는 주민들을 목격하고 카메라에 담았다.

진압군과 경찰들은 모든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이도록 했다. 그리고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 많은 주민들을 심하게 구타하거나, 재판을 거치지 않고 현장에서 총살했다. 우익 세력들이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은 지목당한 사람을 저승길로 보내는 ‘손가락 총’이나 다름없었다. 지난 2019년에 (사)여수 지역사회연구소에서 편역해 펴낸 ‘1948, 칼 마이던스가 본 여순사건’에는 그가 여수와 순천에서 목격한 참상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1949년 전남도에서 세 차례에 걸쳐 조사한 여순사건 희생자 수는 1만1131명에 달했다.

‘여순사건특별법’ 20년 만에 통과

국가 차원의 여순사건 진상 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대장정의 첫걸음이 시작됐다. 지난 6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여순사건특별법’)이 지난 21일부터 시행된 것이다.

‘여순사건특별법’은 2000년 16대 국회부터 2016년 20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모두 네 차례나 발의됐다. 하지만 번번이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하고 회기 종료로 자동 폐기되곤 했다. 그리고 최근 21대 국회에서 전남 동부권 국회의원 5명을 중심으로 다시 발의돼, 20년 만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수 있었다. 여순사건이 발생한 지 무려 73년이 흐른 후의 일이다. 여순사건의 직접적 원인이 됐던 제주 4·3 사건의 경우 2000년에 특별법이 제정되고, 2014년에 국가추념일로 지정된 것과 비교된다.

이번 ‘여순사건특별법’ 시행에 따라 국무총리실 산하에 ‘여순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가 출범하고, 전남도 산하에 실무위원회가 발족했다. 앞으로 1년 동안 희생자 유족들의 신고를 접수받은 후 2년간 진상 조사를 실시하게 된다.

그동안 여순사건은 ‘반란’(反亂)이라는 프레임 속에 갇혀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두 달여 만에 발생한 여순사건을 국군 제14연대의 반란으로 규정, 연좌제 실시와 보도연맹 창설, 숙군(肅軍) 사업, 학도호국단 창설, 국가보안법 통과 등 강고한 우익 반공 체제를 구축하는 계기로 활용했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오랜 시간 ‘반란’이라는 오욕과 고통 속에서 저마다 속으로 피울음을 삼켜야 했으며, 피해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어디서든 ‘함부로 나서지 마라!’는 말을 해야만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도올 김용옥은 지난 2019년 출간한 ‘우린 너무 몰랐다’를 통해 “여순반란이 ‘반란’이 되려면 이승만을 권좌에서 몰아내려는 구체적인 플랜이 있어야 한다”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여수 14연대의 항거는 부당한 명령에 대한 거부일 뿐이며, 사회사적·정치사적으로 보더라도 그것은 가벼운 ‘소요’(騷擾)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든지 정상적 궤도로 컴백될 수 있고, 다스려질 수 있는 소요였다. 이것을 대규모 국민학살극으로 확대시킨 것은 오로지 국가 폭력의 업이었다.”

유가족의 한 담긴 위령비 ‘말줄임표’

우리는 이제서야 여순사건 진상 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 무엇보다 사건이 발생한 지 74년째에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희생자 유가족들이 고인이 됐거나 80~90대 고령에 접어들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여러 절차를 추진함에 있어 보다 속도를 내야 할 필요가 있다.

‘검은 모래 해변’으로 유명한 여수시 만성리해수욕장 인근에는 ‘만성리 형제묘’가 자리하고 있다. 나지막한 봉분 앞에 ‘형제묘’와 ‘원혼비’(원魂碑)라 쓰인 비가 서 있다. 1949년 1월 13일, 당시 헌병들은 여수 종산국민학교에 부역 혐의로 수용됐던 주민 가운데 125명을 이곳에서 총살한 후 기름을 부어 불태웠다고 한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시신을 수습할 수 없어 커다란 봉분을 만들고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는 의미에서 ‘형제묘’라고 이름 붙였다.

‘형제묘’ 근처에 서 있는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의 뒷면엔 아무 말도 새겨져 있지 않다. 다만 말줄임표가 있을 뿐이다. 이른바 백비(白碑)다. 이곳에 희생자 유가족들의 원통한 마음을 풀어주는 ‘해원’(解원)의 메시지가 새겨질 날은 언제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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