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조국에 헌신한 의병장들의 고향과 가문 ②
나주출신 괴정 최시망, 5형제 중 맏이
‘바위처럼 굳다’ 최씨형제 돌최라 불려
구례 석주관전투 참전 의병 왕득인
참봉 왕언기 아들로 본관은 개성
모의장 최대성, 최치원 선생 후손
두 아들 위패 보성 충절사에 봉안
‘바위처럼 굳다’ 최씨형제 돌최라 불려
구례 석주관전투 참전 의병 왕득인
참봉 왕언기 아들로 본관은 개성
모의장 최대성, 최치원 선생 후손
두 아들 위패 보성 충절사에 봉안
![]() 모의장 최대성은 1553년 2월 13일 새벽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아버지 최한손과 어머니 경주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성군 득량면 송곡리에는 최대성과 그의 아들 언립·후립의 위패를 봉안한 충절사가 있다. |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 등장하는 임진왜란 의병장 34명은 격문을 뿌리고 향민을 설득해 의병을 모은 사람들이다. 민족의 부름에 답한 정의의 군병인 의병과 징발이나 징집돼 정규 훈련을 받은 관군은 대부분 서로 힘을 합쳐 왜적과 맞섰다. 다만 관군은 합동작전에 소극적이거나 먼저 후퇴하는 등 의병보다 못한 모습을 보였다. 의병장들은 당파싸움에 환멸을 느껴 관직을 회피하거나 반대파에 몰려 향리에 은둔하던 선비들이었으며, 대부분 뒤에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았다. 다만 황진, 장윤, 이종인 등 공적이 있는 장수들은 현직에 있어 다루지 못했다.
도탄 변사정은 1529년(중종 24년) 3월 2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간, 호는 도탄이다. 삼형제 중 막내로, 대제학을 지낸 변처후의 5대손이다. 어릴 때 이질에 걸린 아버지가 처가인 경상도 안음에서 숨지고, 뒤따라 어머니까지 별세하면서 삼형제가 졸지에 고아가 됐다. 삼년상을 마친 변사정은 서울로 올라가 큰형인 변사원에게 글을 배우고 사서삼경을 독파한 후 성리학에 심취했다고 한다. 그가 남원에 정착한 것은 20세에 남원 생원 김점의 딸 경주 김씨와 혼인하면서부터다. 경상도 안음의 부모 묘소와 100여리 거리로 가까운 남원에 거주하면서 옥계 노진을 찾아가 성리학을 주제로 담론하기도 했다. 1975년 취재 당시 변사정이 22세에 이사와 죽을 때까지 살았던 남원시 송동면 영동리 생가에는 그의 13대손 변문호씨가 살고 있었다.
괴정 최시망은 1548년(명종 3년) 12월 20일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에서 아버지 최명순과 어머니 당악 김씨의 5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풍산리 주민들은 마을의 작은 내를 도래라고 불렀다. 그 유래는 최시망과 그의 종질 효암 최희립에 의해 유래됐다. 그들의 성격이 괴팍하고 바위처럼 굳다고 해 최씨 형제들을 돌최(石崔)하고 불렀으며, 내의 이름도 석최천 또는 석천이라고 했다가 순우리말로 돌내, 언제부터인가 도래가 됐다. 애석하게도 이 도래는 영산강유역개발사업으로 사라졌다. 자는 자유, 호는 괴정을 썼다. 아버지는 승문원 정자 벼슬을 지냈고, 조부는 죽정 최흥, 증조부는 풍구 최간정이다. 12세에 고봉 기대승의 문하에 들어갔고, 17세에 청백리로 소문난 종6품 부사과 박영상의 딸 함양 박씨와 혼인해 동헌·남헌 두 아들을 가졌다. 아버지 최명순은 과거에 대한 집념이 대단해 56세에 과거에 급제했지만 정9품에 오르는데 그쳤다. 생가인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1구 195번지에는 1975년 취재 당시 그의 12대손 최겸룡(당시 62세)씨가 살고 있었다.
왕득인은 1556년(명종 11년) 구례군 광의면 남전리(현 지천리)에서 참봉 왕언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남전으로, 본관은 개성이다. 왕득인의 선조인 왕복명이 태종 이방원과 친분이 있어 왕씨이면서도 화를 면하고 벼슬길에도 나갈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왕득인의 5대조 왕정이 부인 임씨의 권유로 권유로 구례로 낙향했다. 의협심이 강해 1589년(선조 22년) 전라도에 큰 가뭄이 오자 아들 의성을 불러 곳간의 쌀을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행렬이 길게 늘어서 일부 주민들이 밤을 지새우게 되자 사랑방에 재우기도 할 만큼 주민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 생가에는 1975년 취재 당시 왕득인의 12대손 왕인석(80)씨가 살고 있었다. 왕득인의 아들 의성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다시 왜적과 맞섰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거병했다.
모의장 최대성은 1553년(명종 8년) 2월 13일 새벽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아버지 최한손과 어머니 경주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대양으로, 최치원이 시조, 8대조가 고려시대 대사성을 지낸 농은 최해다. 최대성의 증조부인 진사 최윤지가 경주에서 보성으로 이사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해 주민들이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칭송했으며, 돌잔치에서 붓과 벼루를 제치고 활과 칼을 집었다고 알려져 있다. 13세에 죽천 박광전의 문하에 들어갔고 15세가 되던 해 5월 단오날 보성 개흥사 유림 모임에서 시를 발표하며 이름을 알렸다. 17세에 덕산군수 박이성의 딸 진원 박씨와 혼인하고, 언립·명립 형제를 두었다. 안타깝게도 진원 박씨가 젊은 나이에 숨지면서 찰방 김열지의 딸 광산 김씨와 재혼해 셋째 아들 후립을 얻었다. 언립, 후립, 머슴 두리동과 갑술형제가 대성의 거병에 함께 했다.
퇴은당 염걸은 1545년(인종 1년) 4월 15일 강진군 칠량면 율변리에서 고려 공민왕 당시 충경공 염제신의 11대손, 염인형의 큰 아들로 태어났다. 염씨 일가는 경기도 파주에 살다가 몽고족 침략을 피해 나주로, 다시 강진으로 거처를 옮겼다. 어릴 때부터 총명해 4세부터 글공부를 시작했고, 7세에 살구꽃에 노니는 벌을 보고 시를 짓기도 했다. 김광준의 문하에 들어갔고, 8세에 이미 기골이 장대해 밤에는 공부하고 낮에는 나무를 해 집안을 도왔다. 15세에 이미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세고 키가 큰 청년이 됐다. 21세에 큰아들 홍립을 가졌고, 임란 거병에는 염걸의 동생인 염서, 염경, 아들 염홍립이 함께 했고, 모두 전사했다. 염걸의 후손들은 나중에 강진에서 다시 화순 이양으로 이사해 정착했다.
오천 김경수가 태어난 곳은 장성군 북일면 오산리 죽남부락이다. 마을 오른편에 당시 동헌이 있었고 그 아래 남문이 자리했다. 1543년(중종 38년) 아버지 종9품 도사 김응정과 어머니 옥천 조씨 사이에서 태어나 7세부터 큰아버지 김응두에게 글을 배웠다. 벼슬길보다는 학문을 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15세에 하서 김인후의 문하에 들어갔다. 금강 기효련, 하곡 정운룡, 망암 변이중 등과 교류했으며, 이들을 가리켜 사람들은 ‘오산사강단(鰲山四講壇)’이라 불렀다. 3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삼년상을 지냈던 골짜기에 살던 호랑이마저 자취를 감춰 주민들의 효자로 칭송했다. 34세에 건원릉 참봉에 추천되고, 35세에 내첨시 봉사에 임명됐지만, 어머니의 병세가 심해지자 귀향해 다시 삼년상을 치렀다. 이후 출사를 거부하고 사문양자(斯文樣子) 4편을 저술하는 등 후진 양성에 힘썼다. 임란을 닥쳐 거병한 후 아들 극후·극순, 종제 인혼이 고경명의 큰아들 고종후를 따라 진주성에 들어가려하자 흔쾌히 승낙했다. 이들은 모두 진주 남강에 몸을 던져 순사했다. 1597년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해 남원성이 위급하자 종제인 김신남에게 원수를 갚아줄 것을 부탁하고 장성 남문에 나가 울음으로 호소해 200여 명의 의병을 모았다. 이들을 이끌고 전주, 여산을 거쳐 안성에 나가 왜적을 격파했다. 같은 해 9월 10일 파병하고 장성에 돌아와 1621년 7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열사 최욱은 1554년(명종 9년) 나주시 동강면 월송리 몽탄강변에서 창릉 참봉 최춘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사심, 본관은 경주다. 큰 형은 몽송, 둘째 형은 완으로, 형제애가 깊었다고 한다. 임란이 발발하자 거병한 뒤 영암 율치의 김덕흡의 구원 요청을 받고 이동하다가 왜적의 공격을 받아 44세의 나이에 숨졌다. 이후 부인인 오씨가 유복자를 출산해 대를 이었다.
소포 나덕명은 1551년(명종 6년) 8월 8일 나주시 금계동에서 금호 나사침의 6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생가는 현재 그의 아버지 금호공을 비롯해 나주 선조들을 배향한 금호사가 들어서 있다. 율곡 이이, 곤제 정개청 문하에서 공부하고 1597년 28세에 사암 박순의 추천으로 승훈랑 의금부도사를 지내다 1589년 38세에 정여립의 난에 연루돼 함격북도 경성으로 귀양갔다. 귀양간지 3년만에 임란이 일어나자 귀양간 신분으로 거병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1596년 고향인 나주로 돌아와 아버지 나사침이 별세하자 삼년상을 치렀다. 이후 몽탄강(당시 주룡강) 위에 적벽정을 짓고 소일했다. 영암으로 귀양을 온 의병장 곽재우가 적벽정을 찾아 나덕명과 시를 주고 받기도 했다. 1610년 5월 28일 59세 나이로 타계했다.
바다를 너무 좋아해 호를 해광으로 삼은 송제민은 1549년 12월 26일 담양군 대덕면 한실에서 홍문관 정자를 지낸 아버지 송정황과 어머니 광산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이인, 본관은 홍주다. 송정황이 1556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하다 당시 권신인 윤원형과 마찰을 빚자 1557년 귀향하다가 충남 금산에서 객사했다. 고작 9세의 나이로 금산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삼년상을 치렀다. 도량이 크고 선현의 학문에 심취해 성리학과 사서삼경을 공부했다. 18세에 큰 아들 타, 이어 둘째 장, 셋째 집 등 3명의 아들을 두었다. 타는 고경명의 문인으로 이순신의 수군에 종군해 전사했고, 둘째 장은 왜적에 끌려갔다가 고문 끝에 다시 돌아왔으며, 셋째 집도 왜적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송제민은 8년 동안 전쟁터에서 싸운 뒤 무안으로 내려와 정자를 짓고 은둔했다. 원수를 갚지 못했다며 죄인을 자처하며 살다 1602년 2월 27일 54세의 나이에 절명했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 괴정 최시망이 태어난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도래마을. 최시망과 그의 종질 효암 최희립의 성격이 괴팍하고 바위처럼 굳다고 해 최씨 형제들을 돌최(石崔)하고 불렀다. 내의 이름도 석최천 또는 석천이라고 했다가 순우리말로 돌내, 언제부터인가 도래가 됐다. |
왕득인은 1556년(명종 11년) 구례군 광의면 남전리(현 지천리)에서 참봉 왕언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남전으로, 본관은 개성이다. 왕득인의 선조인 왕복명이 태종 이방원과 친분이 있어 왕씨이면서도 화를 면하고 벼슬길에도 나갈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왕득인의 5대조 왕정이 부인 임씨의 권유로 권유로 구례로 낙향했다. 의협심이 강해 1589년(선조 22년) 전라도에 큰 가뭄이 오자 아들 의성을 불러 곳간의 쌀을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행렬이 길게 늘어서 일부 주민들이 밤을 지새우게 되자 사랑방에 재우기도 할 만큼 주민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 생가에는 1975년 취재 당시 왕득인의 12대손 왕인석(80)씨가 살고 있었다. 왕득인의 아들 의성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다시 왜적과 맞섰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거병했다.
![]() 모의장 최대성과 그의 아들 언립·후립의 위패를 봉안한 충절사를 둘러보고 있는 조동수(왼쪽) 전 광주일보 주필. |
퇴은당 염걸은 1545년(인종 1년) 4월 15일 강진군 칠량면 율변리에서 고려 공민왕 당시 충경공 염제신의 11대손, 염인형의 큰 아들로 태어났다. 염씨 일가는 경기도 파주에 살다가 몽고족 침략을 피해 나주로, 다시 강진으로 거처를 옮겼다. 어릴 때부터 총명해 4세부터 글공부를 시작했고, 7세에 살구꽃에 노니는 벌을 보고 시를 짓기도 했다. 김광준의 문하에 들어갔고, 8세에 이미 기골이 장대해 밤에는 공부하고 낮에는 나무를 해 집안을 도왔다. 15세에 이미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세고 키가 큰 청년이 됐다. 21세에 큰아들 홍립을 가졌고, 임란 거병에는 염걸의 동생인 염서, 염경, 아들 염홍립이 함께 했고, 모두 전사했다. 염걸의 후손들은 나중에 강진에서 다시 화순 이양으로 이사해 정착했다.
오천 김경수가 태어난 곳은 장성군 북일면 오산리 죽남부락이다. 마을 오른편에 당시 동헌이 있었고 그 아래 남문이 자리했다. 1543년(중종 38년) 아버지 종9품 도사 김응정과 어머니 옥천 조씨 사이에서 태어나 7세부터 큰아버지 김응두에게 글을 배웠다. 벼슬길보다는 학문을 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15세에 하서 김인후의 문하에 들어갔다. 금강 기효련, 하곡 정운룡, 망암 변이중 등과 교류했으며, 이들을 가리켜 사람들은 ‘오산사강단(鰲山四講壇)’이라 불렀다. 3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삼년상을 지냈던 골짜기에 살던 호랑이마저 자취를 감춰 주민들의 효자로 칭송했다. 34세에 건원릉 참봉에 추천되고, 35세에 내첨시 봉사에 임명됐지만, 어머니의 병세가 심해지자 귀향해 다시 삼년상을 치렀다. 이후 출사를 거부하고 사문양자(斯文樣子) 4편을 저술하는 등 후진 양성에 힘썼다. 임란을 닥쳐 거병한 후 아들 극후·극순, 종제 인혼이 고경명의 큰아들 고종후를 따라 진주성에 들어가려하자 흔쾌히 승낙했다. 이들은 모두 진주 남강에 몸을 던져 순사했다. 1597년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해 남원성이 위급하자 종제인 김신남에게 원수를 갚아줄 것을 부탁하고 장성 남문에 나가 울음으로 호소해 200여 명의 의병을 모았다. 이들을 이끌고 전주, 여산을 거쳐 안성에 나가 왜적을 격파했다. 같은 해 9월 10일 파병하고 장성에 돌아와 1621년 7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열사 최욱은 1554년(명종 9년) 나주시 동강면 월송리 몽탄강변에서 창릉 참봉 최춘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사심, 본관은 경주다. 큰 형은 몽송, 둘째 형은 완으로, 형제애가 깊었다고 한다. 임란이 발발하자 거병한 뒤 영암 율치의 김덕흡의 구원 요청을 받고 이동하다가 왜적의 공격을 받아 44세의 나이에 숨졌다. 이후 부인인 오씨가 유복자를 출산해 대를 이었다.
소포 나덕명은 1551년(명종 6년) 8월 8일 나주시 금계동에서 금호 나사침의 6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생가는 현재 그의 아버지 금호공을 비롯해 나주 선조들을 배향한 금호사가 들어서 있다. 율곡 이이, 곤제 정개청 문하에서 공부하고 1597년 28세에 사암 박순의 추천으로 승훈랑 의금부도사를 지내다 1589년 38세에 정여립의 난에 연루돼 함격북도 경성으로 귀양갔다. 귀양간지 3년만에 임란이 일어나자 귀양간 신분으로 거병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1596년 고향인 나주로 돌아와 아버지 나사침이 별세하자 삼년상을 치렀다. 이후 몽탄강(당시 주룡강) 위에 적벽정을 짓고 소일했다. 영암으로 귀양을 온 의병장 곽재우가 적벽정을 찾아 나덕명과 시를 주고 받기도 했다. 1610년 5월 28일 59세 나이로 타계했다.
바다를 너무 좋아해 호를 해광으로 삼은 송제민은 1549년 12월 26일 담양군 대덕면 한실에서 홍문관 정자를 지낸 아버지 송정황과 어머니 광산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이인, 본관은 홍주다. 송정황이 1556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하다 당시 권신인 윤원형과 마찰을 빚자 1557년 귀향하다가 충남 금산에서 객사했다. 고작 9세의 나이로 금산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삼년상을 치렀다. 도량이 크고 선현의 학문에 심취해 성리학과 사서삼경을 공부했다. 18세에 큰 아들 타, 이어 둘째 장, 셋째 집 등 3명의 아들을 두었다. 타는 고경명의 문인으로 이순신의 수군에 종군해 전사했고, 둘째 장은 왜적에 끌려갔다가 고문 끝에 다시 돌아왔으며, 셋째 집도 왜적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송제민은 8년 동안 전쟁터에서 싸운 뒤 무안으로 내려와 정자를 짓고 은둔했다. 원수를 갚지 못했다며 죄인을 자처하며 살다 1602년 2월 27일 54세의 나이에 절명했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