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深淵)
“독재적 국가주의의 심연(The abyss of autocratic nationalism)을 들여다본 미국인들은 벼랑 끝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개표는 진행 중이지만, 분명한 것은 조 바이든 후보가 선거 승리에 필요한 270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리라는 것이다. 우리 미국의 민주적 제도와 가치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4년간에 걸친 공격은 이제 곧 끝난다.”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뉴욕타임스가 지난 7일 자 지면에 게재한 사설 첫머리다.
미국 대통령 선거 나흘 후에 실린 ‘마침내 조 바이든이 승리하다’라는 제목의 이 사설에서 뉴욕타임스는 트럼프가 통치한 지난 4년간을 ‘빠져나오기 힘들 만큼 깊은 연못’인 심연으로 비유하면서 바이든의 승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편집인들이 심연 속에 무엇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심연을 들여다본다’는 이 표현은 독일 철학자 니체의 저서 ‘선악의 저편’에 등장하는 저 유명한 문장을 연상시킨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본다.” 여기서의 심연이 괴물과 동일시된다는 점에서 유추해 본다면, 바이든에 표를 던진 미국인들은 트럼프가 주도해 온 ‘독재적 국가주의’라는 괴물에 등을 돌렸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뉴욕타임스의 사설은 4년 전 ‘미국 우선주의’에 이어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슬로건으로 내건 ‘미국을 위대하게’라는 정책 비전이 세계 최강 대국으로서 미국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것은 물론 세계 질서를 무너뜨리고 국가를 분열시키는 ‘심연 속 괴물’이라는 점을 지적한 셈이다.
시커먼 심연에 몸서리치며 뒤로 물러서는 미국인들의 모습은 16개월 앞으로 다가온 우리의 대선을 떠올리게 한다.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대치했던 3년 전과 다를 바 없이, 아니 오히려 갈등의 골이 더욱 깊이 파인 정치판을 지켜보는 우리 국민 역시 ‘진영 갈등’이라는 끝 모를 심연에 진저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선 국민을 외면한 채 권력 투쟁에 여념이 없는 정치권의 대오각성이 필요한 때다. /홍행기 정치부장 redplane@
시커먼 심연에 몸서리치며 뒤로 물러서는 미국인들의 모습은 16개월 앞으로 다가온 우리의 대선을 떠올리게 한다.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대치했던 3년 전과 다를 바 없이, 아니 오히려 갈등의 골이 더욱 깊이 파인 정치판을 지켜보는 우리 국민 역시 ‘진영 갈등’이라는 끝 모를 심연에 진저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선 국민을 외면한 채 권력 투쟁에 여념이 없는 정치권의 대오각성이 필요한 때다. /홍행기 정치부장 redpla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