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향 초대석] 김혜순 한복 디자이너
“한복 짓기는 자기다움 찾는 것…다시 태어나도 한복 지을 것”
2020년 09월 22일(화) 00:00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는 어쩌면 실루엣을 이렇게 잘 잡을 수 있을까 할 만큼 너무나도 묘사를 잘해놓았습니다. 옷도 옷이지만 옷 착장법(着裝法)이 너무 재미있어요.”

한복 디자이너이자 전통복식 연구가, 한국문화학 박사인 김혜순 명인은 올해로 39년째 한복을 짓고 있다. 한 땀 한 땀 우리 옷에 ‘혼’(魂)을 불어넣었다. 왕의 복식과 저고리 600년 변천상을 학문적으로 연구·재현하며, 한복의 고운 맵시와 단아한 멋스러움을 널리 알리는데 열정을 쏟았다.

2018년 열린 HERA 서울 패션위크 오프닝패션쇼.
◇풍속도 통해 조선시대 한복연구=명인은 순천시 영동에 자리한 순천 창작예술촌 2호인 한복공방 ‘순천재’(順天齋)에서 ‘한복의 사계-여름:夏’ 전시(7월 10~9월 15일)를 열었다. 신윤복의 ‘미인도’를 모티브로 지은 여름한복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혜원의 ‘미인도’ 그림속 주인공이 입은 여름철 ‘삼회장저고리’(깃과 고름, 끝동에 저고리와 다른 색깔의 천을 댄 저고리)와 치마를 재현했다.

조선시대 한복에 대한 정보의 원천은 조선시대 후기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도를 비롯해 민화(民畵), 출토유물 등이다. 이를 토대로 명인은 ‘왕의 복식’(2002년)과 ‘저고리 600년 변천사’(2003년), ‘기생전’(2005년)을 열었다.

또한 KBS TV 드라마 ‘황진이’(2006년)와 KBS 다큐 ‘의궤, 8일간의 축제’(2013년), MBC 악극 ‘아씨’(2005년),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년)·‘천년학’(2007년), ‘서편제’(1993년) 등에서 전통의상 제작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

“그 당시 기녀(妓女)는 지금의 탤런트인거에요. 패션의 리더였습니다.”

2006년 방영된 드라마 ‘황진이’의 성공 비결은 김 명인의 한복이었다. 황진이(하지원 분) 등 드라마 등장인물들에 맞춰 수백 벌의 옷을 화려하면서도 세련되게 개성적으로 디자인했다. 앞서 명인은 지난 2005년,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서울 옥션센터에서 열린 ‘기생전’에서 조선시대 기생의 옷을 재현했다.

그는 지난 2015년 펴낸 자전 에세이집 ‘한가지 생각’에서 “황진이는 ‘유일무이한 한국적 아름다움의 전형”이라며 “한복을 짓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내 한복의 모델이자 뮤즈였다”고 밝혔다.

최근 찾은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에 자리한 ‘예정(藝丁) 김혜순 한복’ 4층 건물 안팎에는 고향에서 가져온 감나무와 매실, 수국, 도라지꽃 등이 심어져 있어 서정적 느낌을 안겨줬다. 각 층마다 ‘등솔재’(1층)와‘배래재’(2층), ‘도련재’(3층), ‘여밈재’(4층) 등 한복 고유명칭을 붙였다.

지난 2011년 파리에서 열린 ‘조선 왕비, 파리에 가다’전. <김혜순 제공>
◇기녀, 조선 후기 저고리 단소화 유행 선도=“(전쟁과 같은) 시대 때문도 있지만 여자들의 멋 내는 것, ‘어떻게 하면 섹시해 보일까?’ 인간의 본능이에요. 미니스커트처럼 저고리도 차근차근 올라갑니다. (가슴을 가리기 위한) ‘가리개용 허리띠’가 만들어져요. 신윤복 ‘미인도’에 나와요. 규방에서 (기녀들을) 본받아서 복사해서 입었죠.”

한복에도 유행이 있었다. 조선 후기 ‘저고리 단소화(短小化)’ 유행을 이끄는 선두에는 기녀들이 있었다. 규방에 갇힌 양반가 여인들도 기녀들의 유행을 뒤따라갔다고 한다.

이와 함께 명인은 서울 역사박물관(2002년 5월 개관) 의뢰를 받아 왕의 복식 재현에 나섰다. 옷감을 짜기 위해 유물로 남아있는 왕의 옷을 실측했다. 왕의 대례복인 구장복(九章服)은 ‘거의 불면 날아갈 정도로’ 삭아 있었다. 특이하게도 옷감을 꿰맨 손바느질 자국이 남아있지 않았다.

명인은 전시를 마친 후 저서 ‘왕의 복식’을 유희경(100) 복식문화연구원 원장과 공저로 출간했다. 이를 계기로 그에게 해외 유수한 박물관에서 패션쇼 초청 ‘러브 콜’을 보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열린 ‘조선 왕비, 파리에 가다’(2011년 11월)를 비롯해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패션쇼를 열어 한복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다. 한복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쇼로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열린 ‘조선왕, 뉴욕에 가다;(2011년 10월)를 꼽는다.

여수시 율촌면 태생인 김혜순 명인의 한복 인생에서 외삼촌이자 스승인 예정(藝丁) 허영(1947~2000)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한복·전통인형 연구가이자 KBS 3기 탤런트였던 예정은 20대 중반 나이의 그를 한복의 세계로 이끌었다. 허허벌판인 서울시 강남 테헤란로 큰길가에 맞춤한복점 ‘예정 김혜순 한복’을 연때는 1984년 10월께.

특히 예정은 그에게 “네 시대는 바느질로 한복을 하지 않아. 넌 머리로 할 거야”라며 ‘깊이 있게’ 한복을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그 덕분에 명인은 한복을 시작하며 삯바느질 개념이 아니라 한국복식사(服飾史)부터 제대로 공부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2011년 원광대 동양학 대학원에서 ‘원불교 복식의 미적(美的) 고찰’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한국문화학) 학위를 취득했다.

“삼촌은 제게 ‘그냥 바느질만 하는 사람이 아니고, 다음에 이걸 갖고 지키는 사람이 돼야 되지 않겠냐? 그럴려면 모든 분야에 대해 알아야 된다’고 하셨어요. 늘 변하는 게 패션인데 왜 (한복을) 지켜야 되는 지를 세월이 가면서 알 수 있었어요. 역시 삼촌 말씀이 맞았죠.”

순천 문화의 거리에 자리한 ‘순천재’.
◇후학양성 등 고향에 재능기부 =명인은 최근 고향에서 후학 양성과 재능기부 활동을 적극 펼치고 있다. 지난 2016년 12월, 순천시가 구도심 활성화를 위해 추진하는 순천 문화의 거리 창작예술촌에 ‘김혜순 한복’(순천시 옥천길 26) 공방을 열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순천의 문화예술 중심지가 될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 ‘순천재’(順天齋)라고 이름붙였다.

또한 지난 2015년 8월, 순천 청암고에 디자인스쿨 ‘예정관’을 교육 기부해 방과 후 활동으로 미래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들과 다문화가정 여성들을 대상으로 지도를 하고 있다. 순천 황전초등학교 등 4개교에서는 전남도 교육청의 창의·인성교육 특색 프로그램의 하나로 그가 디자인한 한복교복을 입고 있다.

김 명인이 한복과 인연을 맺은 지 올해로 39년이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FENDI’는 그를 ‘세계 아티스트 10인’으로 선정했다.

딸 역시 서양복식사를 전공한 후 한복의 세계화를 위한 ‘한 드레스’(韓 Dress)를 추구하며 어머니의 길을 잇고 있다. 모녀는 2015년에 함께 ‘패션 컬러링북 한복’을 펴냈다.

명인에게 한복은 어떠한 의미일까? 그는 오늘도 꽃과 나무, 고향 바다와 같은 자연의 서정적 감성을 ‘씨줄’로, 전통적 미(美)의식과 현대적 감각을 ‘날줄’로 삼아 한복을 짓고 있다.

“(한복 짓는 일이) 힘들었다면 제가 못 했을 텐데, 힘든 다음에는 언제나 대가로 희열(喜悅)이 크게 와 닿아요. 어찌됐건 다시 태어나도 한복을 할 거예요.”

/글·사진=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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