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천 기자가 추천하는책- 유럽 인문 산책]
유럽 건축·문학·예술에서 삶의 의미를 찾다
윤재웅 지음
2020년 03월 27일(금) 00:00
복원사업이 진행중인 로마의 상징인 콜로세움(위)과 내부에 솟아 있는 역피라미드, 그리고 하나의 작은 피라미드가 인상적인 루브르 박물관. <은행나무 제공>
여행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경험에 따라 관점에 따라 여행을 바라보는 시선도 각양각색이다. 그럼에도 여행의 일반적인 모습은 낯선 곳을 걸으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여행의 경험과 기록은 공간에 대한 단순한 관찰이 아닙니다. 감각과 지각이 만나 오래와 새로가 포옹하는 삶의 새로운 탄생입니다”

윤재웅 동국대 국어교육과 교수의 말이다. 윤 교수가 유럽의 작은 마을과 대도시를 걸으며 깨달은 사유의 결과물을 책으로 묶었다. “느리게 걷고 깊게 사유하는 길”이라는 부제가 붙은 ‘유럽 인문 산책’이 그것. 건축과 문학, 시와 예술을 가로지르는 인문학적 시선과 통찰이 번뜩인다. 비록 현재는 코로나 사태로 유럽의 길이 막히다시피 했지만, 이면에 드리워진 문명의 찬란한 힘은 여전히 경외감을 갖게 한다.

저자의 여행은 단순한 공간에 대한 관찰이 아니다. ‘감각과 지각이 만나 오래와 새로가 교섭하는’ 삶의 현장이다.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일이 잘 어우러져야 한다는 걸 깨치게 되었습니다. 의식주가 삶의 물질적 기반이라면 느낌과 생각과 표현은 정신의 디자인이 아니겠는지요. 표현하지 않았다면 살아날 수 없었던 감각과 기억과 상상력은 제겐 큰 기쁨입니다.”

이탈리아의 도시는 폐허에서 피어오른 지성의 힘을 보여준다.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시칠리아, 살리나에는 고대 그리스부터 유럽 르네상스에 이르는 찬란한 문화가 곳곳에 스며 있다. 특히 로마의 돌길에 대한 윤 교수의 단상은 ‘물류 신경망’으로 표현된다. 그곳은 물량과 속도가 우선시될 수밖에 없는 비정한 인프라로, 질기고 부드러운 가죽신이 필요했을 거라는 얘기다.

저자는 우유, 버터, 신발은 소들이 인류에 주는 선물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우유와 버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신발은 ‘슬픈 선물’에 다름아니다. 만약 돌길이 없었다면 소의 가죽을 벗기는 가혹함도 없었을 거라고 되뇌인다.

‘프랑스 문화의 꽃이자 유럽문화의 자존심’ 루브르 박물관을 바라보는 시선도 이채롭다. 소장품만 40만 점에 이르는 세계 최대 박물관으로 ‘함무라비 법전’, ‘스핑크스’, ‘밀로의 비너스’, ‘모나리자’ 등을 수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 저자의 필이 꽂힌 것은 유리 피라미드. 입구의 큰 유리 피라미드와 아래의 역 피라미드, 그리고 이들을 받치는 작은 피라미드 등 모두 세 개가 주는 역동적 아름다움과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공존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바다 위의 외로운 수도원 몽생미셸은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신성한 미카엘 천사의 산’이라는 뜻의 수도원은 80미터 험한 암벽 위에 세워져 있다. 708년 당시 마을 성당 오베르 주교의 꿈에 외딴 섬 암벽에 예배당을 지어라는 계시가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신비로운 설화보다 돌바닥에 새겨진 숫자들을 주목한다. 거기에는 노동의 양만큼 급여를 받아야 하는 노동자들이, 돌에 숫자를 새겨 나룻배에 실어 보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책에는 스페인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사연도 담겨 있다. 저자는 가장 험한 구간인 론세스바예스에서 느끼는 고독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먼저 용서하고 인사하고 사랑하기는 사소한 일 같지만 사실은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한 가치라는 인식이다.

한편 책 군데군데는 헤밍웨이, 단테, 베게트 등 작가들의 삶과 문학이 녹아 있어 잔잔한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더러는 알베르 카뮈의 문장을 읽거나, 어느 지점에서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연상케 하는 인물을 만날 수 있다.

저자의 인문 산책이 도달하는 지점은 결국 자신과의 만남이다. 걷기의 인문학이 사유로 귀결되는 이유다.

“순례길을 걸으면 스스로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기회가 생기지요. 동행하는 이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가운데 나와 대자연이 고독하게 마주하는 경험 말입니다. 창백한 푸른 점이 되어 점점 더 작은 점이 되어, 마침내 스스로가 무화되는 겁니다. 무화는 없어지는 게 아니라 자연과 하나 된다는 뜻입니다. 길 가는 이의 본질은 고독입니다.”

<은행나무·1만6000원>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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