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희화화, 위장된 부끄러움의 몸짓
2019년 12월 16일(월) 04:50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부끄러움이 엄습하는 것을 느낀다. 이 부끄러움의 감정은 성찰의 첫걸음이며 더 노력하게 만드는 동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의 감정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탁월한 능력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큰 결핍이며 결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내면의 부끄러움을 왜곡하거나 조야(粗野)하게 위장하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과 실수, 또는 무지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품격이 필요하다. 이러다 보니 성찰과는 반대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자신의 부족함이나 무능을 숨기기 위해서 터무니없이 강한 체하거나, 발뺌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꼬리가 밖으로 나와 있는 줄도 모르고 머리를 파묻는 어이없는 짓을 한다.

이렇게 뒤틀린 내면의 부끄러움의 결과를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걸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광대 짓이라고 규정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인간의 가늠하기 어려운 내면의 복잡성과 의식의 다양한 층위를 총체적으로 보여 주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특히 주인공인 표도르의 성격은 종잡기 어렵고 복잡하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상식과 윤리적 기준, 책임감 중 어떤 것도 갖추지 않은 인물로, 오로지 자기보존의 욕망 덩어리이다. 아내와 아들들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무관심하고 비정하며 심지어 폭력적이다. 이런 표도르가 가장 능란하게 하는 일은 자기 희화화이다. 그는 언제라도 필요하면 주저 없이 광대 짓을 해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든다. 큰 아들과의 갈등으로 여러 사람들이 수도원에 모였을 때 역시 표도르는 광대놀이를 하면서 자신의 계획대로 모두를 괴롭힌다. 함께 있는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심지어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표도르는 자신이 먼저 유리한 입장에 서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턱없이 비난하거나, 관심과 동정을 구걸하면서 자신은 부당하게 무시와 피해를 당한 ‘가련한 피해자’일 뿐이라고 일관되게 강변한다. 이런 표도르의 내면을 조시마라는 러시아 정교회 장로는 한눈에 꿰뚫어 본다. 장로는 표도르가 벌이는 온갖 방법의 자기 희화화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마침내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지르는 자가당착의 실수는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하자 표도르가 거침없이 고백한다. “바로 그 때문에 어릿광대가 된 겁니다. 부끄러워서 어릿광대가 된 거지요.” 그러면서 표도르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데, 장로는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자신에게마저 계속 행하는 거짓은 결국 진실의 의미 자체를 분간할 수 없게 하며 삶의 토대인 자기 존중과 신뢰마저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조시마 장로가 보는 표도르의 자기 희화화의 문제는 내면의 부끄러움을 숨긴 채 진실의 가치에 대해 가해지는 무차별한 공격이다. 표도르는 과장된 행동과 앞과 뒤를 뒤집는 말로써 스스로를 우습게 만들고, 능청스럽게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마저 속이며 자신의 속임수에 열광한다. 표도르의 이런 광대 짓은 내면의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서 자기 존엄을 포기하고 구차한 자기 연민에 매달린다는 뜻이다. 표도르의 모습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의식과 내면 사이의 분열이 빚어낸 파괴와 부정의 현상이다. 이 파괴적 극단성은 한 여자를 두고 아들과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는 데에서 정점을 이루고, 표도르는 처참하게 살해당함으로써 파멸한다.

그런데 표도르의 억압되고 뒤틀린 부끄러움은 우리 자신의 것과는 상관없는 것일까? 성찰의 부끄러움 대신 요란한 말장난과 행동으로 상대방을 공격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흐리면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는 표도르는 왜 우리에게 낯설지 않을까? 줄줄이 앉아서 머리를 삭발하는 과잉의 정치적 단호함이나, 남의 나라 국기를 앞세우고 목청을 높이는 ‘애국심 넘치는 국민’들을 보면서 결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일이 한순간에 명징해졌다. 스스로 표도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희화화에 취한 그런 표도르와 이제 정말 결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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