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우연과 필연 사이 -황현진 ‘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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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소설에서 피해야 할 요소로 두 가지를 꼽으라면, 복권과 죽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복권은 틀림없이 운에 좌우되는 우연적 장치이고, 죽음은 틀림없이 운명적으로 맞닥뜨릴 필연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란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개연성의 징검다리를 놓아 건너는 도강(渡江)과 같은 것이라서 그중 어느 하나가 조금이라도 힘이 세면 강물에 휩쓸려 버리기 십상이다.
폭발하는 갈등을 해결하지 못해 결국 등장인물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은 이제 막 소설을 습작하기 시작한 학생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수법이다. 등장인물의 동선과 행동이 막혀 있는 순간에 난데없이 복권에 당첨되어 이것저것 해결이 가능하게 되는 설정은 요즈음 일일 드라마에서도 쓰지 않는다. 너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너무나 우연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황현진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호재’는 우연의 끝에서 필연의 끝까지 활시위를 끝까지 당긴 소설이다. 한 사람(주인공 호재의 고모부)의 비극적 운명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사건의 알리바이가 증명되지 않은 아버지에게 일어난 우연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게 된다. 호재는 그 이름만큼 복을 타고 나지는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책임을 방기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 그의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역시 호재를 놓아 버린다.
호재에게는 고모(두이)와 고모부밖에 없다. 그들은 가족으로서 단란한 한때를 통과하기도 하지만, 호재에게 오래 숨겨 온 아버지 두오의 비밀은 시한폭탄처럼 폭발할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 폭탄의 화력이 눈앞에 보였을 때, 호재는 두오는 물론 두이에게서까지 완전히 결별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홀로 된 호재의 삶은 지금 청년의 삶을 핍진성 있게 그려 내는 캐릭터가 된다. 케이블방송 바둑 채널의 계약직 작가로 일하며 되도록 먼 미래를 그리지 않고 눈앞의 하루에 최선을 다한다. 미래의 희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니라, 남에게 싫은 소리나 허튼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할 뿐이다. 직장에는 툴툴거리는 정규직 PD가 있고 능글맞게 다가오는 후배 남자 직원이 있다.
중요한 촬영을 앞둔 어느 날, 하필 눈은 쏟아지고 일정은 자꾸 뒤로 밀리는데, 누구 하나 호재를 배려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원망할 데라고는 자기 자신밖에 없음을 자각하며, 방향을 잃은 원망을 주워 담는 중에 휴대전화가 울린다. 두이의 전화다. 네 고모부가 죽었다. 심지어 강도의 칼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호재에게는 이토록 호재를 담은 소식은커녕 필연적 고통조차도 우연하게 다가든다. 누구에게나 죽음의 순간은 있겠지만, 그것이 사고사일 확률은 적기 때문이다. 안면이 없는 강도에게 칼에 찔려 죽는 일은 여러 우연들이 겹치고 또 겹쳐야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호재와 호재 주변에 일어나는 일이 허황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호재가 자라 온 서울 서쪽 변두리의 후미진 지역과 호재가 지금 일하고 있는 서울 서쪽의 방송단지를 번갈아 비추며 이야기의 살을 붙인다. 특히 호재의 어머니는 물론 그 어머니의 시어머니에서부터 뿌리를 내려 버틴 이야기는 현재의 호재를 어쩌다 거기에 있는 개인으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로또 복권을 매주 사는 것으로 삶을 위무했던 고모부처럼 황현진의 이야기는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성실하게 실을 뽑듯 그린다. 고모부의 로또 번호처럼, 황현진의 인물들도 부재하거나 무력하다. 하지만 그들은 삶을 지속해 나간다. 굴곡이 있더라도 괜한 희망으로 일주일을 버티며, 괜한 희망을 찾아 그보다 더 먼 미래를 상상하지 않으며.
소설의 말미에는 사라진 아버지가 다시 나타난다. 그는 호재에게 선택지를 준다. 호재가 무엇을 선택하든 호재의 삶은 그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재는 호재라서, 호재의 삶을 기어코 이어 나갈 것만 같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어느새 호재를 응원하게 된다. 어쩌면 이 땅의 거의 모든 청춘이 호재를 닮았으므로, 그 응원은 마땅하고 적합한 것이다. 우연과 필연 사이의 활시위를 당긴다. 삶이라는 화살이 나아간다. 거기에 호재가 있기를…. ‘호재’를 읽은 사람이 보낼 수 있는 연말의 응원이라고 해 두자. <시인>
황현진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호재’는 우연의 끝에서 필연의 끝까지 활시위를 끝까지 당긴 소설이다. 한 사람(주인공 호재의 고모부)의 비극적 운명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사건의 알리바이가 증명되지 않은 아버지에게 일어난 우연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게 된다. 호재는 그 이름만큼 복을 타고 나지는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책임을 방기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 그의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역시 호재를 놓아 버린다.
그렇게 홀로 된 호재의 삶은 지금 청년의 삶을 핍진성 있게 그려 내는 캐릭터가 된다. 케이블방송 바둑 채널의 계약직 작가로 일하며 되도록 먼 미래를 그리지 않고 눈앞의 하루에 최선을 다한다. 미래의 희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니라, 남에게 싫은 소리나 허튼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할 뿐이다. 직장에는 툴툴거리는 정규직 PD가 있고 능글맞게 다가오는 후배 남자 직원이 있다.
중요한 촬영을 앞둔 어느 날, 하필 눈은 쏟아지고 일정은 자꾸 뒤로 밀리는데, 누구 하나 호재를 배려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원망할 데라고는 자기 자신밖에 없음을 자각하며, 방향을 잃은 원망을 주워 담는 중에 휴대전화가 울린다. 두이의 전화다. 네 고모부가 죽었다. 심지어 강도의 칼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호재에게는 이토록 호재를 담은 소식은커녕 필연적 고통조차도 우연하게 다가든다. 누구에게나 죽음의 순간은 있겠지만, 그것이 사고사일 확률은 적기 때문이다. 안면이 없는 강도에게 칼에 찔려 죽는 일은 여러 우연들이 겹치고 또 겹쳐야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호재와 호재 주변에 일어나는 일이 허황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호재가 자라 온 서울 서쪽 변두리의 후미진 지역과 호재가 지금 일하고 있는 서울 서쪽의 방송단지를 번갈아 비추며 이야기의 살을 붙인다. 특히 호재의 어머니는 물론 그 어머니의 시어머니에서부터 뿌리를 내려 버틴 이야기는 현재의 호재를 어쩌다 거기에 있는 개인으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로또 복권을 매주 사는 것으로 삶을 위무했던 고모부처럼 황현진의 이야기는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성실하게 실을 뽑듯 그린다. 고모부의 로또 번호처럼, 황현진의 인물들도 부재하거나 무력하다. 하지만 그들은 삶을 지속해 나간다. 굴곡이 있더라도 괜한 희망으로 일주일을 버티며, 괜한 희망을 찾아 그보다 더 먼 미래를 상상하지 않으며.
소설의 말미에는 사라진 아버지가 다시 나타난다. 그는 호재에게 선택지를 준다. 호재가 무엇을 선택하든 호재의 삶은 그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재는 호재라서, 호재의 삶을 기어코 이어 나갈 것만 같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어느새 호재를 응원하게 된다. 어쩌면 이 땅의 거의 모든 청춘이 호재를 닮았으므로, 그 응원은 마땅하고 적합한 것이다. 우연과 필연 사이의 활시위를 당긴다. 삶이라는 화살이 나아간다. 거기에 호재가 있기를…. ‘호재’를 읽은 사람이 보낼 수 있는 연말의 응원이라고 해 두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