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대 지하신문 ‘녹두’(綠豆)
2019년 12월 02일(월) 04:50
이제는 우리 지역 민주화운동 역사도 조금씩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내년이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벌써 40년이니, 반세기 가까운 시절의 회고를 통해 옛 역사를 점검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1985년, 군부독재가 기승을 부려 양심을 지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숨이 막혀 허우적거릴 때였지만, 우리는 결코 눈 감고 살아갈 수는 없었다. 80년의 투옥자들이 대부분 출소한 때가 83년, 그해 연말부터 홍남순 변호사를 회장으로 모시고 반독재 운동가들이 집결하는 5·18구속자협의회가 탄생했다.

숨죽였던 시민들이 다시 일어나면서, 85년에는 ‘광주 5월민중혁명 희생자 위령탑 건립 및 기념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가 창립되었다. 그때도 위원장은 홍 변호사님이었다. 그 창립 선언문을 내가 썼던 기억이 난다. 시작 부분을 보자.

“인류 역사는 폭압과 강제의 무도한 지배층에 항거하여 민중이 역사의 주체이기 위한 기나긴 싸움의 장정이었다. 80년 광주의 5월 민중혁명은 동학혁명, 4·19혁명과 함께 부정과 부패, 탄압에의 위대한 거부를 통하여 우리 민족사에 새로운 장을 열어젖힌 혁명적 민중항쟁이었다…” 5·18 민중혁명의 뿌리가 동학혁명에서 자라났음을 만천하에 선언한 내용이다. 그렇다. 조선 5백 년의 역사에서, 동학운동은 민중혁명의 요건을 갖춘 대표적인 민중항쟁이었다.

70∼80년대 이후 전남대에서 전개된 민주화 투쟁의 정신적 투쟁 이론은 언제나 동학혁명에서 찾았고, 그런 동학의 혁명정신이 투쟁과 항쟁의 이론적 배경이었음을 그 당시 투쟁가들은 기억할 것이다. 동학혁명 정신이 구체적으로 학생운동에 접목된 역사적 사실이 있으니 그 하나가 바로 1971년 가을 전남대에 뿌려졌던 ‘녹두’(綠豆)라는 지하신문이었다. 그 무렵 대학가에는 대학의 병영화에 결사반대하는 ‘교련 반대’ 시위가 요란했다. ROTC(학도군사훈련단)와 교련으로 학생들을 묶어 두며 대학을 병영화하려던 책동에 거대한 반대 운동이 전개되던 무렵, 동학혁명 정신으로 군부독재에 항거하자는 녹두지(綠豆紙)의 창간사는 전남대에서 가장 강렬한 교련 반대 투쟁이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창간사의 제목부터가 과격했다. ‘동학(東學)의 투혼(鬪魂)으로 민족·민주(民族·民主)의 횃불을!’이라는 제목에 “이산된 민족을 모으고 학대받는 민중을 일으켜 새로운 민족사를 창조하려는 역사적 진운은 창세기 직전의 용트림처럼 성숙해 버린 혁명 전야의 한반도 하늘 아래다. 목 메인 향수처럼 우리는 오늘을 만들어 왔고 오늘을 기다린 바 있다”라고 서두를 꺼내고, “조선농민운동사 최후의 자랑이요, 역사의 진운이던 저 동학혁명의 아버지, 이 나라 민족주의의 위대한 창시자, 녹두 전봉준 선생의 불같은 투혼을 상기하자. 조선 5백 년 역사에서 동학혁명의 위대한 교훈과 웅장한 민족혼이 없고서야 그것도 역사라 하였을 건가!”라는 논조를 펴서 동학정신으로 가혹한 군부독재의 쇠사슬을 끊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내용이었다. 그때 나는 대학원생이어서 창간사만 써주었을 뿐 실제로 제작하여 뿌린 사람은 후배 학생들이었다.

그 시절 송정민(전남대 신방과 교수)과 고재득(성동구청장 4선) 등 많은 학생들은 혹독한 수사를 받았고, 모두 퇴학당하여 학교에 다니지 못할 형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버티며 나를 거론하지 않아 그때 나는 무사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그렇게 끈끈한 의리로 뭉쳐서 살았었다. 녹두지는 전남대 학생운동사에서 동학과 학생운동을 접목시켜 주는 역할을 했고, 72년 유신 직후 뿌려진 ‘함성’이라는 지하신문의 모태가 되었다. 김남주·이강 등 혁혁한 민주투사들은 함성지 사건으로 투옥되었고, 전사와 투사로 역사에 빛나는 업적을 이뤘다. 고인이 된 김남주 시인은 혁명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녹두지의 전체 내용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간행하는 ‘기억과 전망’ 2017년 여름호에 모두 수록되어 그때의 투쟁 역사를 자세하게 읽을 수 있다. 송정민 교수와 고재득 청장 등은 의리를 지킨 나의 대학 후배들이고 김남주·이강 또한 나의 대학 후배들로서, 그들의 민주화운동 업적은 세상에 빛나는 혁혁한 투사의 위치에 올라 있다. 이 나라 정신사에서, 민족·민주 투쟁 역사에서, 녹두 전봉준 장군의 혼은 너무나 위대하다. ‘척양척왜’ ‘보국안민’ ‘제폭구민’ ‘인내천’ 등의 정신이 아니고 이 나라의 미래를 이끌 혼을 어디서 찾겠는가. 그래서 ‘녹두’는 두고두고 거론될 지하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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