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광주교도소 습격설의 진실 - 신군부가 ‘광주 청문회’ 때 문서 조작해 퍼뜨린 허위사실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교수]
교도소 경비 31사단·3공수 기록
시민들 습격 내용 존재하지 않아
1988년 국회 청문회 준비 과정
국보위 보고서에서 조작해 기록
1980년 작성된 것처럼 만들어
교도소 경비 31사단·3공수 기록
시민들 습격 내용 존재하지 않아
1988년 국회 청문회 준비 과정
국보위 보고서에서 조작해 기록
1980년 작성된 것처럼 만들어
![]() 옛 광주교도소 전경. 5·18 때 시민들의 습격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 군이 일방적으로 시민들을 학살하고 암매장한 야만적인 국가폭력의 현장이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
![]() 문서 1. 국보위 보고서 (1988년 조작본) |
![]() 문서 3. 3공수 전투상보 (교도소작전 공식 기록) |
![]() 문서 3. 3공수 전투상보 (교도소작전 공식 기록) |
![]() 문서 2. 31사단 전투상보 (교도소 작전) |
![]() 문서 5. 국보위 보고서 (1980년 작성 원본) |
5·18민주화운동 당시 무장한 시민이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이른바 광주교도소 습격설은 숱한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실처럼 간주되고 있다. 심지어 5·18민주화운동의 사법적 정의를 구현한 12·12군사반란 및 5·18내란 행위에 관한 대법원의 판결에서도 광주교도소 습격은 신군부의 주장이 대부분 채택되었다. 이처럼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광주교도소 습격설의 실체적 진실을 군 기록 연구를 통해 새롭게 접근해보고자 한다.
전두환은 2017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처음 습격한 것은 5월 21일 12시경이었다. 당시 광주교도소는 31사단 병력이 경비중이었는데 무장시위대가 총을 난사하며 공격해서 3공수여단을 긴급 증파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전두환은 “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가장 집요하게 공격했다는 사실은 광주사태의 성격을 파악하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북한군 개입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6월 연재<6월20일자 10면>에서 언급했듯이 신군부는 5·18 직후인 1980년 6월 6일 국보위 내무분과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던 이광로 육군 소장을 단장으로 하여 ‘광주사태 합동조사단’을 구성했다. 합동조사단은 법무부, 내무부, 국방부,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전두환이 회고록에 기술한 광주교도소 습격에 관한 내용은 이광로의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 증언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은폐된 군 기록에서 확인된 새로운 사실
전두환 등 신군부관계자들은 5월 21일 12시 20분 광주교도소 습격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교도소 경비업무를 수행한 31사단의 군 기록에는 교도소 습격에 관한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31사단 전투상보에 따르면 5월 21일 광주교도소에서는 시민들과의 충돌이 없었다. <문서 2>의 31사단 전투상보 광주교도소 작전요도에는 “난동자와 조우, 수색중대장의 설득 권유로 자진 철수”라고 명기되어 있다.
전두환이 광주교도소에 대한 1차 습격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12시 20분은 물론 31사단이 경비를 책임진 17시까지 공격은 커녕 단 한번의 충돌도 없었다. 5월 21일 오후 1시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 발포 이전에 시민들이 무장을 하고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전두환의 주장은 허구라는 것이 31사단 전투상보를 통해 확인된다.
5월 21일 17시 45분 31사단 병력은 광주교도소 경비업무를 3공수여단에게 인계하고 오치동의 31사단 사령부로 철수했다. 전두환의 주장처럼 광주교도소가 무장한 시민들의 집요한 공격으로 위급한 상황이었다면, 무장한 500여명의 31사단 병력이 사령부로 되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31사단으로부터 교도소 경비업무를 이관받은 3공수여단 전투상보에는 5월 21일 19시 20분경 공격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광로가 3차 습격이라고 주장한 시각과 일치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3공수여단의 전투상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3공수여단이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그 시각의 작전은 교도소 공격에 맞선 방어작전이 아니라 외곽도로 차단과정에서 발생한 것임이 확인된다.
<문서 3>은 3공수여단 전투상보의 광주교도소 작전요도이다. 전투상보의 작전요도는 작전의 개요 및 상황을 그림으로 축약한 것이다. 따라서 작전요도에는 그 작전의 성격과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3공수여단의 광주교도소 작전요도에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점은 군의 주둔지와 도로차단 장애물의 설치 위치이다. 만약 전두환 등 신군부의 주장처럼 교도소 방호가 주된 작전이었다면 방호의 핵심 요소에 주요 장비를 배치하는 것이 타당하다.
<문서 3>의 작전요도에서 확인되듯이 3공수여단은 자신들이 보유한 핵심 장비인 APC장갑차를 교도소 정문이 아닌 담양간 고속도로에 배치했다. 광주교도소는 5m 높이의 외곽 담장으로 둘러쌓여 있다. 따라서 교도소 방호를 위해서는 정문 차단이 관건임에도 불구하고 APC장갑차와 주요 차단시설은 정문이 아닌 외곽도로 차단에 주로 투입되었다. 3공수여단의 주요 작전 목표는 교도소 방어가 아닌 외곽도로 차단이었다.
특히 <문서 4>의 교도소 지역 병력배치 요도에 따르면 3공수여단의 작전에 따른 시민들의 희생은 모두 도로 차단 지점에서 발생했다. 시민들의 피격 위치를 보면 교도소 공격은 고사하고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장소에서의 사망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교도소 습격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인가를 증명하는 군 기록이다. 시민들의 피격지점이 표시된 <문서 4>의 전투상보 작전요도는 1988년 광주청문회에 제출된 군의 공식기록인 <문서 3>의 전투상보와는 달리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자료이다.
1995년 특검과정에서 3공수여단 관계자는 각 대대에서 차출된 사격선수로 구성된 여단 저격수들을 교도소 건물의 망루 위에 배치하여 접근하는 시민들에게 사격을 가했다고 진술했다. 일반 저격병도 모자라 사격선수 출신의 특출한 사격능력을 보유한 병사들로 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광주교도소는 전두환의 주장처럼 시민들의 집요한 습격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 군의 일방적 학살이 있었던 야만적인 국가폭력의 현장인 것이다.
5월 21일 광주교도소의 경비업무를 수행한 31사단과 3공수여단의 군 기록에서는 전두환이 주장하는 교도소 습격은 거짓임이 확인된다. 그럼 1988년 국회청문회 과정에서 광주교도소 습격설의 근거로 제시된 <문서 1>의 국보위 합동조사단의 보고서는 어떻게 작성된 것일까? 광주교도소 습격설이 공식화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문서 1>의 국보위 보고서는 조작된 문서이다. 이광로가 1988년 국회 청문회에 보고한 <문서 1>의 보고서는 1980년 작성한 <문서 5>의 보고서를 왜곡·조작한 것이다.
<문서 5>는 필자가 새롭게 발굴 확인한 국보위 합동조사단의 정식 보고서이다. 이 문서는 1980년 6월 작성 이후 1988년 국회 청문회 준비과정에서 신군부에 유리한 내용을 추가한 <문서 1>의 문서로 재작성되면서 특정 기관에 은닉하는 방법으로 폐기되었다.
1980년 작성된 국보위 보고서에 따르면 5월 21일 13시경에는 방산업체인 아세아 자동차에서 군용 장갑차를 비롯 차량 200대를 탈취, 장성, 광산, 나주 등 20개 시군으로 시위가 확산되었으며, 16시경에는 약 20만명의 시민이 중심가에 운집함으로써 계엄군은 외곽으로 철수 봉쇄작전에 돌입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문서 5>의 국보위 보고서에는 5월 21일 광주교도소 습격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실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1988년 국회청문회에서 공개한 국보위 보고서에는 5월 21일 12시 20분부터 익일 5시까지의 광주교도소 공격 내용이 새로 추가되었다. 1980년 작성된 보고서에 복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폭도라는 표현과 이들이 탈취한 탄약 및 무기의 수량, 시간대별 광주교도소 습격 내용이 추가 기술되었다.
신군부의 청문회 대응 논리에 따라 교도소 습격이라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실을 새롭게 추가한 조작 문서가 버젓이 1980년 작성된 국보위 보고서처럼 제출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조작된 문서에 기반한 교도소 습격이라는 허구가 진실처럼 간주되는 왜곡이 발생했다. 사후 조작과 거짓에 기반한 광주교도소 습격설이 배척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hesal@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