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시인이 세상에 남긴 시·인간에 대한 이야기
가기 전에 쓰는 글들 - 허수경 지음
2019년 10월 11일(금) 04:50
“날카로운 혀를 늘 심장에 지니고 다니렴.”

2018년 3월22일. 생의 끝을 예감한 시인은 자신의 마지막 책을 만들어줄 이에게 보낸 편지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시인 허수경이 아끼는 후배이자 편집자인 시인 김민정에게 보낸 글이다. “시인이니/ 시로 이 세계를 가름하는 걸/ 내 업으로 여기며 살아왔으니/ 마지막에도 그려려고 한다”며 가기 전에 쓴 ‘시들’과 ‘말들’을 세상에 내놓으려 하는 그녀의 간절함과 절박함이 담긴 글이다.

허수경은 그해 10월 3일 독일 뮌스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수목장을 위해 뒤늦게 뮌스터로 날아간 김 시인은 작고 낡은 노트북 한대와 모눈종이로 된 스프링 노트, 은행업무와 누군가의 전화 번호와 주소가 적힌 각종 메모들을 챙겨 한국으로 돌아왔다.

허수경 시인 1주기를 맞아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이 나왔다. 시인의 남편은 “수경이는 바이올렛이야”라 말했고, 그 말처럼 보랏빛 표지를 입은 시인의 유고집은 생의 통찰이 담긴 ‘아주 긴 시(詩)’처럼 읽힌다.

1부는 2011년부터 2018년까지 ‘글들’이라는 폴더 안에 7년간 써내려간 시작 메모를 시기별로 담아냈다. ‘희망들’, ‘병상일기’, ‘가기 전에 쓴 글’ 등의 이름이 붙은 폴더들이다. 2부는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출간한 이후 타계하기 전까지 각종 문예지에 발표한 시들을 모았다. 3부는 시인이 자신의 시에 부친 작품론과 시론으로 채웠다.

8년간의 세월이 담긴 책에는 언어에 대한, 시에 대한, 인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함께 ‘삶과 죽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삶을 살아가고 있는 기괴한 장소’인 병원의 풍경 등 발병 이후, 죽음을 앞둔 이의 감정 변화 등도 세세히 담겼다. 또 시와 함께 그녀 삶의 또 다른 축이었던 고고학과 발굴에 대한 이야기, 김혜순·문태준 ·박준 등 선후배 문학인들에 대한 단상 등도 실렸다.

1992년 뮌스터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후 당시 지도교수와 결혼, 독일에 거주하며 시작활동을 해온 시인은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등의 시집과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너 없이 걸었다’ 등의 산문집을 펴냈다.

산문들을 엮은 또 한권의 유고집은 2020년 6월9일 시인의 생일에 맞춰 출간될 예정이다. <난다·1만6000원>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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