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14>
카라얀 덕분에 듣던 음악을 보게 됐다
최초의 뮤직 비디오…감각을‘편집’
잡스의 혁신은 기계를 만지게 한 것
이텐 “서로 비교하고 분석하라”
시대는 항상 새로운 ‘편집’ 원해
2019년 10월 11일(금) 04:50


















요즘은 이종격투기가 대세다. 한때 우리를 그토록 흥분케 했던 권투나 레슬링은 이제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이종격투기의 시작은 1976년 6월 26일 있었던 안토니오 이노키와 무하마드 알리의 대결이었다. 이노키는 시종일관 누워서 경기를 했다. 경기는 무승부로 아주 싱겁게 끝났다. 알리는 “누워서 돈 버는 사람은 창녀와 이노키뿐”이라며 화를 냈다. 그러나 그 후, 레슬링과 권투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스포츠가 ‘이종격투기’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편집’되기 시작했다.

시대는 항상 새로운 ‘편집’을 원한다. 편집을 거부하면 몰락한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 그토록 혁신적이었던 이유도 기계와 인간의 사이를 매개하는 ‘인터페이스의 편집’에 있다.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은 대단히 폭력적이었다. 인간은 기계를 ‘때리거나’, ‘두들겼다’. 타자기의 자판을 ‘줘 패던’ 폭력적 습관은 컴퓨터라는 엄청나게 예민하고 지능적인 기계가 나타난 후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잡스의 애플은 기계를 만질 수 있게 해줬다. 만지고 쓰다듬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 상호작용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만 만지고 쓰다듬는다. 이토록 지극히 인간적인 상호작용을 기계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감각의 혁명적 편집이다.

시나 소설 같은 문학도 마찬가지다. 시는 랩에게, 소설은 유튜브나 ‘짤방’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문학이 음악이나 영상과 ‘편집’된다는 이야기다. 클래식 음악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유럽의 유명 클래식음악 공연장을 가보면, 노인들뿐이다.

그나마 카라얀이 없었다면, 클래식 음악은 망해도 벌써 망했을 것이다. 그는 클래식 음악을 처음으로 볼 수 있게 해 준 사람이다. 최초의 뮤직비디오를 만든 사람이 카라얀이다. 사람들은 최초의 뮤직비디오를 1975년 만들어진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먼저인 1967년, 카라얀은 오페라 ‘카르멘’을 뮤직비디오로 처음 제작했다. 그 후에 나온 다양한 버전의 카라얀 주연, 카라얀 감독의 뮤직비디오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카라얀이 위대한 것은 훌륭한 지휘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시각과 청각의 창조적 ‘편집자’였다.



바우하우스, 공감각적 훈련을 시작하다

감각을 스스로 편집할 수 있는 능력을 ‘공감각(synesthesia)’이라고 한다. 시각·청각·후각과 같은 감각은 해당 물리적 자극과 1:1로만 대응한다. 소리자극(음파)에는 청각이, 가시광선에는 시각이 반응한다.

그런데 그 대응방식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소리를 들으면 색깔이 떠오르고, 냄새를 맡으면 소리가 떠오르는 경우다. 극히 일부 사람들만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적절한 환경을 조성하면 누구나 공감각적 경험을 할 수도 있다. 러시아 심리학자 라자레프(P.P. Lazarev)는 음악을 들을 때 전등을 껐다 켰다 하면 음악소리가 달라지는 경험을 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빛이 있으면 소리가 커지고, 빛이 사라지면 소리가 작아진다는 것이다. 청각이 시각적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예술교육에서 강조되었던 것은 바로 이 공감각적 훈련이었다. 물론 바우하우스 당시에 ‘공감각’은 그리 널리 알려진 개념이 아니었다. 1800년대 초반부터 공감각적 현상이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됐지만 독일에서는 1925년 이후에야 ‘Synsthesie’라는 개념이 학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 예술교육 자료들을 살펴보면 공감각과 동일한 내용의 개념들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형태’와 ‘색채’의 관계를 공감각적으로 설명하는 그 유명한 칸딘스키의 ‘세모는 노랑, 네모는 빨강, 동그라미는 파랑’이라는 공감각적 도식은 오늘날 바우하우스를 대표하는 상징이 된다.

바우하우스는 일부 선천적 능력을 가진 자들만의 능력인 ‘공감각’을 예술교육을 통해 구현하려고 했다. 수십 년이 지나 ‘에디톨로지적으로’ 돌이켜보니 그렇다는 이야기다. 시작은 요하네스 이텐이었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5월에 시작됐지만, 새로운 예술교육은 없었다. 구태의연한 아카데미적 예술교육, 즉 대상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거나 조각하는 훈련을 반복했을 뿐이었다. 그해 6월에 열린 학생들의 첫 작품전을 보고 파이닝거는 한숨만 푹푹 쉬며 “죄다 쓰레기”라고 했다.

경험·분석·재구성 통해 예술을 가르치다

그해 여름, 드디어 이텐이 부임했다. 전쟁으로 인해 학생들은 기초적인 예술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고, 학생들의 수준도 제각기였다. 이텐은 ‘예비과정’의 필요성을 그로피우스에게 제안했다. 그로피우스가 개교하며 주장한 각 공방을 통한 수공예 교육을 본격 시작하기 전, 각 학생들이 가진 재능과 능력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술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선언하며 바우하우스를 개교했지만, 정작 구체적 교육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어떤 아이디어도 없었던 그로피우스는 이텐의 이니셔티브가 너무나 고마웠다. 그해 가을학기부터 한 학기 동안의 예비과정을 설치하고 교육의 모든 내용과 운영을 이텐에게 맡겼다. 1921년부터 ‘예비과정’은 바우하우스의 모든 신입생들이 공부해야하는 필수과정이 되었다.(아, 이건 치명적이었다. 이텐이 학생 선발의 권한까지 쥐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텐은 훗날 자신의 바우하우스 시절을 회고한 ?‘나의 바우하우스 예비과정(Mein Vorkurs am Bauhaus)’란 책에서 당시 예비과정의 목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였다고 썼다. ‘학생들의 창조력과 예술적 능력을 자유롭게 해방시켜주는 것’과 ‘학생들의 졸업 후 직업선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 이를 위해 학생들이 예술작업을 위한 다양한 재료를 경험하고 자신의 예술적 체험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오늘날의 심리학 용어로 말하자면 ‘메타인지(meta-cognition)’의 배양을 예비과정의 핵심 교육내용으로 삼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이텐은 학생들에게 종이·유리·나무·모피·돌·금속 등등의 예술재료를 놀이를 통해 시각·촉각적으로 경험하게 했다. 그리고 이러한 재료를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하게 했다. 감촉, 형태와 색채, 그리고 재료에 동반되는 리듬 등을 여러 가지 대비적 관점을 동원해 분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크다/작다, 두껍다/얇다, 많다/적다, 직선/곡선, 높다/낮다, 면적/중량, 미끄러움/거침, 강함/부드러움, 움직임/정지, 가벼움/무거움, 강함/약함 등등의 대비를 통해 대상을 분석하는 방식이다. 이텐은 학생들에게 이 같은 대비를 통한 분석의 결과를 3가지 방식으로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즉 ‘감각적 경험’ ‘합리적 객관화’ ‘종합적 조형’이다.

에디톨로지적 용어로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대상을 편집할 수 있는 최소의 단위로 분석한다. 이때 분석의 수단은 다양한 차원의 대비다. 그리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눠진 ‘편집의 단위’들을 자신만의 상상력을 동원해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때 ‘편집의 차원’은 기존의 경계를 뛰어넘어 서로 교차된다. 이텐의 예술교육은 ‘편집의 단위(unit of editing)’와 ‘편집의 차원(level of editing)’이 이런 방식으로 창조적으로 얽혀 들어가는 감각의 편집과정이었다. 감각의 ‘이종격투기’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광주일보와 중앙SUNDAY 제휴기사 입니다>





1. 1922년 그로피우스가 개념화한 바우하우스의 교육 프로그램. 원 바깥쪽 ‘예비과정(Vorlehre)’에서 시작해 가장 가운데 ‘건축(Bau)’까지 이르는 과정이다. 중간에는 다양한 형태의 재료를 다루는 공방이 있다.

2. 뮤직 비디오를 처음 만든 오스트리아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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