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
2019년 09월 11일(수) 04:50
외갓집 하면 달리 무엇을 해도 잘 받아줄 것 같은, 묶인 줄도 풀어 줄 것 같은, 여유와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 같다. 그래서 방학만 되면 그 먼 곳을 향해 달려가던 때가 있었다.

오늘 모임이 있어 약속 장소에 30분 먼저 도착하니 시간이 어정쩡하기에 식당 앞 건너편에 있는 찻집에서 커피 한잔할 겸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니 유자차가 먼저 눈에 들어와 “여기 유자차 한 잔 주세요” 하니 그때서야 “죄송합니다. 먼저 주문부터 받아야 하는데…” 하며 미안해 한다. 손님이 없는 조용한 공간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달콤한 향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유자차가 식기를 기다리니 불현듯 유자나무가 있는 외갓집 생각이 난다.

외갓집에 처음으로 간 것은 초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겨우 반년 차 인근 초등학교에 다니던 터라 바깥 세상 구경은 처음 하는 셈이다. 고흥을 떠난 후 처음 가는 친정 나들이는 6·25 전쟁에 참전하신 후유증으로 큰외삼촌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기차가 출발하니 전신주도 달리고 집과 논밭들도 기차를 따라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만 보내기가 불안하셨는지 동행하신 아버지께, 어린 나는 신기하고 놀라서 “아버지, 집도 따라오고 전봇대도 따라오네”라고 큰소리로 말하니 소란하던 기차 안은 웃음 바다를 이뤘다. 멋쩍어 하는 나를 어머니는 감싸 안아주셨다. 검은 연기를 산 아래로 흘리고 숨을 몰아쉬듯, 칙칙 거리며 장성 갈재를 넘은 기차가 송정리역에 도착하니 순천 방향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탔다. 아버지는 거기까지 배웅하고, 어머니와 나는 조금은 불안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벌교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시끌벅적한 열차 안은 마치 도떼기시장 같았다. 긴 곰방대를 피워 대며 상대방은 안중에도 없는 할아버지의 담배 연기가 천장을 휘젓는다. 마치 저녁 무렵 우리 집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앞에 앉은 나의 코를 자극했다. 보성에서는 직접 잡은 해산물을 함석 대야에 담아 이고 벌교 장에 팔러 가는 아주머니 일행의 걸쭉한 사투리도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려 해 질 무렵에야 벌교역에 내렸다. 내리자마자 역 앞의 버스정류장으로 가 고흥 가는 버스를 알아보니 조금 전에 막차는 떠났단다. 내일 첫 버스 시간을 알아본 후 어머니를 따라 역전 근방 어느 허름한 국밥집에 들어갔다. 기차 안에서 삶은 계란에 카스텔라 빵(그때 먹어 본 빵맛은 지금껏 최고였던 것 같다)까지 먹었기에 어머니는 연신 “체할라. 누가 안 뺏어 먹으니 천천히 먹어라”고 당부하신다. 어머니는 설거지를 함께 하시고는 주인 아주머니가 자는 안방에서 나와 함께 잘 수 있었다.

새벽에 식사를 거른 채 고흥 가는 첫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비포장도로여서 울퉁불퉁한 신작로 길을 먼지를 뒤집어쓴 채 버스는 외갓집을 향해 달렸다. 이윽고 도착한 외갓집에는 홀로 되신 외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를 비롯하여 4대가 살고 있었다. 여름방학을 맞은 아들과 함께 처음 맞은 친정나들이인 어머니는 한 보름 외가에 머물기로 한 모양이다. 인근에 사는 이모들을 비롯한 친척들을 두루 만나면서 쌓인 이야기를 나누고 지내셨다. 그동안 나는 해만 뜨면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막내 외삼촌과 들로 바다로 돌아다녔다. 바다는 처음인지라 여름 햇살에 물비늘이 반짝이며 고깃배가 떠가는 풍경은 신기하게만 보였다.

돌로 쌓은 물웅덩이는 마치 항아리를 닮은 물고기 저금통 같았다. 독초를 풀어 막대기로 휘저어 놓으면 서서히 물고기들이 떠올랐다. 메기, 민물장어 등이 먼저 떠오르고 붕어 등 차례로 떠올랐다. 손으로 잡거나 소쿠리로 뜨기만 하면 되었다. 큰 고생 없이 금방 양동이에 한가득 찼다. 해가 질 무렵에야 기진맥진하여 집으로 돌아오면 외할아버지는 멀리서 온 외손자 야단은 못 치고 “어딜 갔다 이제야 오냐. 다치거나 하면 어쩌려고 그려” 하시며 막내 외삼촌만 혼을 내셨다. 애써 잡은 물고기는 “먹지도 못할 거 잡아 왔다”며 돼지 밥그릇에 부어 버리셨다.

외갓집은 내가 사는 정읍과 비슷한 전라도 농촌이지만 말씨가 다르고 풍습도 다르다. 우물가에는 꽤 큰 오래된 유자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탱자보다 훨씬 크게 달려 있었다. 그때는 어리고 잘 몰라 그렇게 귀한 나무인지는 몰랐다. 마을 뒤에는 팔영산이 병풍처럼 우뚝 서있고 산 주위로 펼쳐진 풍경은 호남평야가 펼쳐진 내가 사는 곳과 무언가 달랐다. 그렇게 한 보름 다녀온 나는 한 달 동안은 자신도 모르게 익힌 남도 사투리로 친구들 앞에서 외갓집 이야기를 자랑처럼 했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지금은 아무도 안 계신 외갓집의 추억이 옛날이야기처럼 잊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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