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암서원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법고창신 계기로
2019년 09월 10일(화) 04:50
지난 7월 6일은 우리나라의 문화계에 대단히 큰 역사적인 날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회의에서 ‘한국의 서원’을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한 것이다.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서원’이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의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 세계적으로 볼 때 불교나 기독교 유산에 비해 유교 유산은 세계 유산에 등재된 사례가 적어서 이번의 한국의 서원이 등재된 것은 우리의 문화 민족으로서의 위상을 드높여 준 대단한 쾌거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1995년 처음으로 등재된 ‘석굴암·불국사’를 비롯해 ‘창덕궁’과 ‘남한산성’ 등 유네스코 등재 세계 유산 14곳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번 서원의 등재 대상은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을 비롯하여, 9개의 서원을 묶어서 지정한 것인데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서원의 분포를 보면 영남 지방이 여섯 개이고, 충청·호남은 세 개 밖에 안 되어 차이가 있다.

특히 우리 호남 지역에서 유일하게 지정된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은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숭앙하려고 1590년에 지은 서원이다. 김인후는 1540년 문과에 합격했고, 이후 인종이 왕이 되기 전 세자 시절에 가르쳤다. 그러나 인종이 1545년 즉위 9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사화가 일어나자 명종의 여섯 차례의 부름을 거절하고 낙향하여, 학문을 탐구하고 후진을 기르면서 잘못된 세상을 한탄하였다.

하서 김인후는 우리나라의 역사상 가장 학문적 소양을 갖춘 성군인 정조대왕이 ‘도학(道學) 절의(節義) 문장(文章)의 해동 제일인자’라고 극찬하면서 하서 사후 236년이나 지난 뒤에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배향을 시키고, 1659년 필암서원이라는 사액을 내려 명부조한 큰 인물이다.

조선의 국가 경영의 가장 근본 철학이었던 성리도학을 천명도 등으로 심오하게 궁구하고, 불의에 저항하여 권력실세에 야합하지 않는 충절의 정신이 오늘날 호남과 광주가 나라의 위기 때마다 의병과 시민의 저항으로 나타난 의향의 정신적 토대도 되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소쇄원 48영이나 면앙정 30영 등 1600여 수의 시와 부를 짓고, 백련초해, 자연가 등을 우리 말로 지어 국문학적 가치를 높였으며, 정철 등 성산가단에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학계에서 발표되고 있다.

호남 지역에서는 대원군때 서원 훼철이 되지 않은 유일한 서원이며, 서원에 걸린 현판은 당대의 대가들인 송준길, 송시열, 윤봉구 등이 썼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대도시인 광주에서 불과 30여 분의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시민들이 근처에 우리 정신 문화의 원류이며, 역사와 철학, 문학이 융합된 수준 높은 문화 유적지인 필암서원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르고 지나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광주가 아시아 문화전당을 비롯해서 문화적 메카로 자부하고, 의향(義鄕) 예향(藝鄕)이라고 하지만, 우리들의 문화적 마인드는 어디쯤 자리하고 있을까를 되돌아 보게 한다.

필암서원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계기로 세계에서 인정한 인류 전체의 유산이 우리 지역에 있음을 긍지와 자부심으로 여기고, 역사와 전통, 유물과 유적, 그곳에 서린 보편적 가치를 찾아 더욱 발전시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일대 문화 혁명이 촉발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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