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의 정석(丁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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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다산초당에 오르면 왼쪽 뒤편에 ‘정석’(丁石)이란 두 글자가 새겨진 바위를 볼 수 있다. 정약용이 쓴 이 글씨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 정약용이 강진에서 보낸 유배 생활은 18년. 그 가운데 후반기 10년 6개월을 이 다산초당에서 보냈다. 그 전에는 강진현 동문 밖의 주막집 뒷방,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의 집 등을 전전하였다. 1808년 3월 16일에 처음으로 윤단(尹단)의 다산초암(茶山草庵)에 간 정약용은 그 그윽한 산수에 흠뻑 빠지고 만다. 얼마나 마음에 드는 곳이었는지는 그때 지은 ‘다산팔경사’(茶山八景詞)와 ‘다산화사’(茶山花史) 20수에 나타나 있다.
시 속의 ‘산인’(山人) ‘산옹’(山翁) ‘선생’(先生)은 자기보다 18세 위였던 윤단을 말한다. 도가사상에도 심취했던 윤단은 여기에서 양생술에 열심이었다. 귀양 온 지 8년간 주막집에선 술밥, 절집에선 나물밥, 제자 집에선 눈칫밥을 먹으며 어렵게 글쓰기에 힘쓰던 정약용에게 저술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다.
정약용의 의중을 안 윤단의 승낙이 있자 아들 윤규·윤규하 형제는 낡은 초암의 리모델링에 힘을 쏟는다. 정약용은 마침내 오랜 안식처를 얻었고 필생의 사업인 저작 활동에 열중할 수 있었다. ‘주역사전’ ‘논어고금주’ ‘목민심서’ 등 수많은 걸작이 이곳에서 책으로 묶였다. 그때 정약용은 윤단의 풍모에서 옛 중국의 신선 정령위(丁令威)를 연상하였을 것이다.
정령위에 관한 기록은 도연명(陶淵明)의 이름을 빌린 ‘수신후기’(搜神後記)에 처음 나온다. “정령위는 본래 요동 사람으로 영허산에서 도를 닦았다. 학이 되어 고향으로 와 성문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있었다. 이때 어느 소년이 활로 쏘려고 했다. 학은 날아올라 공중을 빙 돌며 말했다. ‘새야 새야 정령위야. 집 떠난 지 천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네. 성곽은 여전하나 사람들은 변했구나. 어찌 신선술은 배우지 않고 무덤만 널려 있나’ 그리고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신선술은 배우지 않고 무덤만 널려 있나’… 세속의 삶이 전부가 아니며 그 이상의 승화의 세계가 있다는 정령위의 탄식에, 윤단의 세속 초월 의지뿐만 아니라 당시 권력자들의 작태에 고뇌하던 정약용의 동의가 내포된 듯하다. 윤단을 기념하여 그 바위에 두 글자를 새기고 읊은 정약용의 시를 보자.
“대나무 집 서쪽에 돌병풍이 있는데, 부용성 꽃 주인은 이미 신선이로세. 학 날고 그림자 떨어져 이끼 푸르고, 기러기 발자국 깊어 글자 자취 푸르구나. 기이한 돌보고 절한 미불은 미친 게 아니라 겸허하였고, 술 취해 누운 도잠은 득의망형(得意忘形)이로다. 부열의 바위, 우임금의 석굴도 잡초에 묻혔거늘, 어찌 구구하게 글을 새기랴.”
이끼 무늬 푸른 자리는 ‘부용성 꽃 주인’ 윤단이 ‘앉았던 자리’이며, 윤단의 지취로 보아 그를 기념함에 긴 말은 군더더기였다. 정약용은 이 시에 다음과 같은 주(注)를 달았다. “다산 서쪽 푸른 돌병풍에 정석(丁石) 두 글자를 새겼다. 이미 이름 내지 않으려는데 왜 이름을 내는가? 없어지지 않을 이름이라면 이름을 내지 않더라도 크게 이름날 것이요, 없어질 이름이라면 이름을 내더라도 홀로 널리 알려질 수 있겠는가? 이름나나 이름나지 않으나 그것이 그것이로다.”
이처럼 정약용은 윤단을 신선 정령위에 비겨 기리면서 윤단의 지취와 삶을 정석(丁石) 두 글자에 압축하여 기념하였다. 다시 말해, 정석(丁石)의 ‘丁’은 정약용(丁若鏞)의 정(丁)이 아니라, 정령위(丁令威)의 정(丁)이니, 바로 ‘윤단’을 뜻한다. 우리는 이 고사에서 ‘다산초당에서의 십년’이 정약용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공일 뿐만 아니라, 정령위와 윤단의 선기(仙氣)가 정약용의 내면을 관류하던 한 청정한 기운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정령위에 관한 기록은 도연명(陶淵明)의 이름을 빌린 ‘수신후기’(搜神後記)에 처음 나온다. “정령위는 본래 요동 사람으로 영허산에서 도를 닦았다. 학이 되어 고향으로 와 성문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있었다. 이때 어느 소년이 활로 쏘려고 했다. 학은 날아올라 공중을 빙 돌며 말했다. ‘새야 새야 정령위야. 집 떠난 지 천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네. 성곽은 여전하나 사람들은 변했구나. 어찌 신선술은 배우지 않고 무덤만 널려 있나’ 그리고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신선술은 배우지 않고 무덤만 널려 있나’… 세속의 삶이 전부가 아니며 그 이상의 승화의 세계가 있다는 정령위의 탄식에, 윤단의 세속 초월 의지뿐만 아니라 당시 권력자들의 작태에 고뇌하던 정약용의 동의가 내포된 듯하다. 윤단을 기념하여 그 바위에 두 글자를 새기고 읊은 정약용의 시를 보자.
“대나무 집 서쪽에 돌병풍이 있는데, 부용성 꽃 주인은 이미 신선이로세. 학 날고 그림자 떨어져 이끼 푸르고, 기러기 발자국 깊어 글자 자취 푸르구나. 기이한 돌보고 절한 미불은 미친 게 아니라 겸허하였고, 술 취해 누운 도잠은 득의망형(得意忘形)이로다. 부열의 바위, 우임금의 석굴도 잡초에 묻혔거늘, 어찌 구구하게 글을 새기랴.”
이끼 무늬 푸른 자리는 ‘부용성 꽃 주인’ 윤단이 ‘앉았던 자리’이며, 윤단의 지취로 보아 그를 기념함에 긴 말은 군더더기였다. 정약용은 이 시에 다음과 같은 주(注)를 달았다. “다산 서쪽 푸른 돌병풍에 정석(丁石) 두 글자를 새겼다. 이미 이름 내지 않으려는데 왜 이름을 내는가? 없어지지 않을 이름이라면 이름을 내지 않더라도 크게 이름날 것이요, 없어질 이름이라면 이름을 내더라도 홀로 널리 알려질 수 있겠는가? 이름나나 이름나지 않으나 그것이 그것이로다.”
이처럼 정약용은 윤단을 신선 정령위에 비겨 기리면서 윤단의 지취와 삶을 정석(丁石) 두 글자에 압축하여 기념하였다. 다시 말해, 정석(丁石)의 ‘丁’은 정약용(丁若鏞)의 정(丁)이 아니라, 정령위(丁令威)의 정(丁)이니, 바로 ‘윤단’을 뜻한다. 우리는 이 고사에서 ‘다산초당에서의 십년’이 정약용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공일 뿐만 아니라, 정령위와 윤단의 선기(仙氣)가 정약용의 내면을 관류하던 한 청정한 기운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