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의 창’] 일본인의 속마음과 현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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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혼네’는 본심(本心)이란 뜻인데, 일본인들은 이 혼네를 잘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혼네에는 바른 마음, 양심이란 뜻도 있다. 필자는 몇 년 전 큐슈(九州) 남부 미야자키(宮崎)현의 사이토바루(西都原) 고분군을 답사하다가 크게 놀랐다. 1912년 발굴 당시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발굴단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서기 3세기 말에서 6세기에 걸쳐 조영(造營)된 무덤들인데, 현지에서 구입한 책자(‘九州の古墳’)에는 이 고분군을 ‘황조(皇祖)의 발상지’라고 쓰고 있었다. 현재 일 왕가를 연 선조들의 무덤이란 뜻이다.
이 분야에서 방대한 연구를 한 북한 학자 조희승은 ‘임나일본부 해부’(2012)라는 책에서 이 고분군을 가야계 고분이라고 확언하고 있다. 실제로 근처 박물관에는 가야고분에서 나온 철모·철제갑옷과 100% 똑같은 철모·철제갑옷을 전시하고 있다. 이마니시 류는 1912년의 발굴로 일본 왕가를 만든 사람들이 가야계라는 사실과 일 왕가의 시작이 빨라야 서기 3세기 말에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혼네는 ‘일 왕가의 조상은 가야계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혼네를 억누르고 일 왕가는 서기전 660년에 시작했다고 1000여 년을 끌어올리고, 고대 야마토왜가 가야를 지배했다고 거꾸로 주장했다. 국익을 위해 혼네를 감춘 것이다. 나아가 그는 ‘삼국사기’ 기록을 가짜로 모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주창하면서 연대부터 맞지 않는 ‘일본서기’가 사실이라고 우겼다. 남한 강단사학계는 아직도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과 ‘임나=가야설’을 정설이라고 떠받들고 있다. 이마니시 류의 혼네가 지하에서 남한 강단사학의 정설을 비웃고 있을 것이다.
작금의 한일 관계도 마찬가지다. 현재 현안이 되고 있는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 문제에 대해 일본은 1965년 박정희 정권과 맺은 한일청구권 협정을 방패로 삼는다.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는 “양 체약국은…청구권에 관한 문제가…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돼 있다. 일본은 이 규정을 근거로 배상 책임이 없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한 개인이 제공한 노동, 그것도 강제로 제공한 노동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할 권한은 없다. 법률적으로도 이런 논리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난해 한국 대법원에서 강제징용에 대한 개인 청구권이 남아 있다고 본 판결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은 이 판결을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판하면서 심지어 강제징용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자발적 노동자였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위안부 문제와 다르지 않다. 일본은 어린 소녀들을 강제로 끌고 간 사실을 부인한다.
가야계가 일 왕가의 시조인 것을 이마니시 류가 알았던 것처럼 일본인들의 혼네도 위안부나 징용이 강제라는 사실과 개인의 천부적 권리는 국가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독일인들처럼 과거 식민 지배를 처절하게 반성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단시일에 해결될 수도 없다. 그래서 일본에는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되, 금전적 보상은 한국의 민관(民官)이 하는 것이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해결책일 것이다.
월남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선생은 일본시찰단의 일원으로 도쿄의 병기공장을 시찰한 후 “성경에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했으니 이것이 걱정이오”라고 일침을 가했다. 조선주둔군 사령관 우쓰노미야(宇都宮)가 감기에 걸렸다고 말하자 “아니, 감기는 대포로 못 고치시오?”라고 되받아 일본인들의 혼네를 흔들었다. 하와이 교포들이 민립대학 설립 모금 운동 차원에서 초청하자 “동포들의 뜻은 고마우나 나는 일본 여권으로는 하와이는커녕 천당에서 오라 해도 가지 않겠소”라고 거절할 정도로 원칙이 뚜렷했다.
현 정부에도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강제징용에 대한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는 것으로 일본인의 혼네와 세계의 여론에 묻고 금전적 보상은 우리가 하는 대승적 자세로 해결책을 찾자는 것이다.
<신한대 대학원 교수>
작금의 한일 관계도 마찬가지다. 현재 현안이 되고 있는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 문제에 대해 일본은 1965년 박정희 정권과 맺은 한일청구권 협정을 방패로 삼는다.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는 “양 체약국은…청구권에 관한 문제가…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돼 있다. 일본은 이 규정을 근거로 배상 책임이 없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한 개인이 제공한 노동, 그것도 강제로 제공한 노동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할 권한은 없다. 법률적으로도 이런 논리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난해 한국 대법원에서 강제징용에 대한 개인 청구권이 남아 있다고 본 판결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은 이 판결을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판하면서 심지어 강제징용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자발적 노동자였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위안부 문제와 다르지 않다. 일본은 어린 소녀들을 강제로 끌고 간 사실을 부인한다.
가야계가 일 왕가의 시조인 것을 이마니시 류가 알았던 것처럼 일본인들의 혼네도 위안부나 징용이 강제라는 사실과 개인의 천부적 권리는 국가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독일인들처럼 과거 식민 지배를 처절하게 반성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단시일에 해결될 수도 없다. 그래서 일본에는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되, 금전적 보상은 한국의 민관(民官)이 하는 것이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해결책일 것이다.
월남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선생은 일본시찰단의 일원으로 도쿄의 병기공장을 시찰한 후 “성경에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했으니 이것이 걱정이오”라고 일침을 가했다. 조선주둔군 사령관 우쓰노미야(宇都宮)가 감기에 걸렸다고 말하자 “아니, 감기는 대포로 못 고치시오?”라고 되받아 일본인들의 혼네를 흔들었다. 하와이 교포들이 민립대학 설립 모금 운동 차원에서 초청하자 “동포들의 뜻은 고마우나 나는 일본 여권으로는 하와이는커녕 천당에서 오라 해도 가지 않겠소”라고 거절할 정도로 원칙이 뚜렷했다.
현 정부에도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강제징용에 대한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는 것으로 일본인의 혼네와 세계의 여론에 묻고 금전적 보상은 우리가 하는 대승적 자세로 해결책을 찾자는 것이다.
<신한대 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