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여기 산 자들이 있다
- 장강명 연작소설 ‘산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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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되지 않은 이야기다. 토요일 오후 겁도 없이 서울역 앞에서 택시를 탔는데 하필 광화문과 종로 일대에서 노조 집회가 있었더랬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고, 집회가 벌어지는 현장도 아니었음에도 가는 길에 차가 꽉 막혀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어서 중간에 내려 전철을 타야 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택시 기사님은 멀찍이 보이는 집회 행렬에 대고 무한정한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다. 다 먹고살 만하니 나와서 저런다는 식이었는데,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길에 나온 사람 때문에 먹고사는 일에 지장을 받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그런 말들이 아이러니하여 몇 번을 속으로 곱씹었다. 먹고사는 일의 고단함에 대하여.
그것보다 더 최근에는 택시 기사들이 대형 집회를 열었다. 차량 공유 서비스를 반대하는 집회였고, 지금까지도 택시 업계에서는 생존권을 이유로 어떠한 경쟁 서비스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날 서울역에서 안국역 인근까지 거친 말들을 뱉어 냈던 기사님도 광화문 광장에 있었을까. 그보다 확실한 것은 다른 누군가가 그날 기사님이 그랬던 것처럼 광장의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할 것이라는 점이다. 택시 업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일반 여론은 ‘타다’ 같은 새로운 서비스를 원하는 것 같다.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결국 광장에 나선 택시 기사님들도 또 다른 경쟁 상대를 맞이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팽창에 예외란 없는 법이니까.
이런 남들의 사정에 우리는 큰 관심이 없다. 택시든 우체국이든 학교 급식실이든 자동차 공장이든 내 삶의 불편을 끼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 아닌 타자의 먹고사는 문제에 끼어들 틈을 우리의 팍팍한 삶은 허락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산 자들’은 그런 존재다. 기어코 열심히 내 삶을 꾸려나가는 존재, 그러나 남의 삶에 닥친 어려움에는 애써 고개 돌리는 사람. 장강명 연작소설 ‘산 자들’은 철저하게도 그러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극히 리얼리티를 살린 장강명 특유의 서사에 몇 번이고 숨이 턱턱 막히지만, 소설이 주는 진정한 아득함은 다른 데에 있다. 산 자들은 결국 모두 죽으리라는 것. 그 객관적인 묘사와 냉철한 통찰.
‘산 자’라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오랫동안 다른 의미가 있었다. 불의에 저항하다 동료 죽어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낄 때, 결단코 그 깃발을 들어 앞으로 나아가던 사람들을 우리는 산 자라 불렀다. 앞선 산 자가 뒤에 서 있는 산 자더러 나를 따르라고 말하던 시기가 있었다. 더디 가더라도 우리에게는 대오라는 게 있었다. 누구는 연대라고 부를 것이고 또 누군가는 조직이라 불렀던 그 무언가가, 같이 살자고 말하던 날들이 있었다. 오월의 광주와 6월의 광장을 지나, IMF를 거쳐 촛불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산 자들이란 그 전의 그 사람들이 아니다. 그럼 누굴까? 그들은 장강명의 소설에서 가쁜 숨으로 산다.
정리 해고 과정에서 두 갈래로 나뉘었던 현장 노동자, 대기 발령을 받고 회사의 휴지 취급을 받는 사무직 노동자, 여러 번 겪어 왔던 듯이 본인의 몫을 찾는 알바생과 그를 잘라야 하는 직원, 200m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깎아먹는 경쟁을 펼쳐야 하는 빵집 자영업자들, 아나운서 시험을 보기 위해 풀메이크업을 한 채로 서울에서 창원까지 향하는 지망생들…. 지금 시대에는 그들이 산 자들이라고 장강명의 소설은 말한다. 이 시국에 그들더러 따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산 자들은 각자도생한다. 그래야 죽은 자가 되지 않는다. 죽은 자들은 대부분 길이 아닌 길을 대오라고 착각하고 따른 자들이었다.
이토록 잿빛인 소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장강명의 ‘산 자들’을 읽으면 적어도 쉽게 말할 수는 없다. 파업이 불편하다고, 취업 준비생의 눈이 너무 높다고, 자영업자가 망하는 건 당연하다고. 쉽게 말하지 않는 태도와 복잡하게 생각해보는 시선이 아무래도 먼저일 것이다. 택시 기사가 우편 노동자를, 출판 편집자가 반도체 노동자를,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대학 비정규직 강사를….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를 쉽게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산 자들이기 때문이다.
<시인>
‘산 자’라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오랫동안 다른 의미가 있었다. 불의에 저항하다 동료 죽어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낄 때, 결단코 그 깃발을 들어 앞으로 나아가던 사람들을 우리는 산 자라 불렀다. 앞선 산 자가 뒤에 서 있는 산 자더러 나를 따르라고 말하던 시기가 있었다. 더디 가더라도 우리에게는 대오라는 게 있었다. 누구는 연대라고 부를 것이고 또 누군가는 조직이라 불렀던 그 무언가가, 같이 살자고 말하던 날들이 있었다. 오월의 광주와 6월의 광장을 지나, IMF를 거쳐 촛불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산 자들이란 그 전의 그 사람들이 아니다. 그럼 누굴까? 그들은 장강명의 소설에서 가쁜 숨으로 산다.
정리 해고 과정에서 두 갈래로 나뉘었던 현장 노동자, 대기 발령을 받고 회사의 휴지 취급을 받는 사무직 노동자, 여러 번 겪어 왔던 듯이 본인의 몫을 찾는 알바생과 그를 잘라야 하는 직원, 200m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깎아먹는 경쟁을 펼쳐야 하는 빵집 자영업자들, 아나운서 시험을 보기 위해 풀메이크업을 한 채로 서울에서 창원까지 향하는 지망생들…. 지금 시대에는 그들이 산 자들이라고 장강명의 소설은 말한다. 이 시국에 그들더러 따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산 자들은 각자도생한다. 그래야 죽은 자가 되지 않는다. 죽은 자들은 대부분 길이 아닌 길을 대오라고 착각하고 따른 자들이었다.
이토록 잿빛인 소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장강명의 ‘산 자들’을 읽으면 적어도 쉽게 말할 수는 없다. 파업이 불편하다고, 취업 준비생의 눈이 너무 높다고, 자영업자가 망하는 건 당연하다고. 쉽게 말하지 않는 태도와 복잡하게 생각해보는 시선이 아무래도 먼저일 것이다. 택시 기사가 우편 노동자를, 출판 편집자가 반도체 노동자를,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대학 비정규직 강사를….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를 쉽게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산 자들이기 때문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