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뽕’과 ‘국까’ 사이
2019년 06월 10일(월) 04:50
청소년기 혼자 영화 보기를 즐겼던 나는 영화 시작 전에 울리는 ‘애국가’가 꽤나 불편했다. 남다른 정치적 신념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음반마다 한 곡씩 삽입되었던 이른바 ‘건전가요’처럼 그 ‘애국가’가 내 미감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스크린 가득 휘날리는 태극기와 함께 자발적으로 일어선 극장의 관객들 속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들어야 한다는 게, 예컨대 영화 ‘터미네이터’나 ‘백 투 더 퓨처’를 보기 위한 준비로는 생뚱맞다고 느낀 것이다.

극장의 스크린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애국가가 흘러나와도 나는 팔짱을 낀 채 객석 의자에 파묻혀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런 나를 대놓고 꾸짖는 어른들은 없었지만, 그리고 ‘애국가’ 1절이 흐르는 1분 남짓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벌떡 일어선 관객들의 숲 속에서 혼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매번 진땀 나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 내게는 애국심이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애국’의 행위나 태도가 정통성이 부족한 정권에 의해 강요된 비합리적 맥락 속에서 많은 경우 ‘미감을 거스르는’ 일이 되어 왔다는 사실은 넓게 보아 한국 현대사의 희비극이기도 하다. 이러한 희비극은 최근의 이른바 ‘태극기부대’의 행보로 이어진다. 어린 시절 음반 속 ‘건전가요’나 극장의 ‘애국가’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그악스런 ‘태극기부대’가 표방하는 ‘애국’ 또한 젊은 세대들의 미감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듯하다.

세대를 불문하고 진보적이거나 비판적인 정치 성향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이들일수록 (최근에는 이른바 ‘헬조선’ 담론에 동참하면서) 자주 ‘애국’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이나 냉소적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냉소는 대체로 당대의 젊은 세대들과 공명하여 세대 간 진영 논리를 형성하기도 했다. 인터넷 용어로, ‘국뽕’(‘국가’와 ‘히로뽕’이 결합된 용어로 도취적 자국중심주의를 보이는 태도나 사람을 가리킴)보다는 그래도 ‘국까’(‘국가’와 ‘까다’라는 단어가 결합된 용어로 자국에 대한 원색적 비난을 일삼는 행위나 사람을 가리킴)가 젊은 세대에게 좀 더 ‘쿨’해 보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이미 ‘쿨한 국뽕’이 대두하고 있다. 특히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후진국 콤플렉스를 일소하고 있는 세련된 글로벌 스타들, 예컨대 EPL의 손흥민, MLB의 류현진, 그리고 피아니스트 조성진, 보이그룹 ‘방탄소년단’의 국제적 활약은 인터넷 담론상에서 ‘국까’를 오히려 ‘쿨’하지 못한 모습으로 보이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대중심리를 곧바로 ‘애국’이나 ‘애국심’과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진보 정치가 계속해서 환멸과 냉소의 수사에 의존하고 편협한 ‘국까’로서의 이미지로 비치는 한, 젊은 세대들의 미감과 더 이상 공명하기는 힘들 것 같다.

한국에서 ‘애국’이 정치적 보수를 위한 배타적 언어처럼 간주되어 온 이유는 ‘애국’ 자체가 보수적 이념이어서가 아니라 한국의 진보 정치 세력이 이 개념과 관련한 프레임 전쟁에서 자칭 보수 세력에게 졌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한국의 보수 세력은 ‘애국’이라는 말을 독점하여 ‘반공’이라는 뜻으로 전용하는 데에 성공했다. ‘애국 보수’라는 흔한 표현은 사실상 ‘반공 보수’를 뜻할 뿐이다. 결국 ‘무엇이 애국인가?’는 한국 사회에서 아직 제대로 답해지지 않은 물음으로 남아 있다. ‘애국가’를 어떻게 듣고 불러야 하는 것인지도.

적어도 그 한 가지 답변은 1980년 광주에서 제시되었다. 지난 5월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 속 어느 증언이 기억에 남는다. 오월 민중항쟁 당시 무기 반납을 거부하고 최후 항전을 불사한 어느 익명의 시민군이 했다는 말, “우리도 애국 한 번 할랍니다.” 광주의 시민군이 목숨을 내걸고 실천한 ‘애국’은 무엇이었을까? 광주의 시민군들은 일반 시민에게 총을 겨누는 국가의 반란군에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국뽕’이 아니었지만,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불렀다는 점에서 ‘국까’도 아니었다. 청소년기의 씁쓸한 기억과 거듭 제기되는 작곡가의 친일 논란에도 내가 ‘애국가’라는 노래를 온전히 부정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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