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예빈 소설가] 숨겨진 독립 운동가, 묻힌 역사를 찾아서
2019년 06월 04일(화) 04:50
광주시 양림동에는 대저택이 있다. 이 저택의 원래 주인이 흥학관을 짓고 운영했던 최명구(1860~1924), 최상현(1880~1945) 부자라는 것을 알고 큰 감동을 받았다. 흥학관은 민족 계몽 운동과 독립 운동의 요람으로서 일제 강점기 지역 사회에 횃불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런데 흥학관에 대해서도, 흥학관을 짓고 운영했던 최명구 최상현 부자에 대해서도 아는 이가 많지 않은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필자는 소설 ‘호랑가시나무 언덕’에서나마 그의 애국 애족 정신을 기리고자 했다. 광주 독립 운동가들의 항일 운동에 관해 쓴 졸저 ‘호랑가시나무 언덕’에서 최명훈이란 이름으로 나온 최상현은 주요한 역할을 한다.

필자는 신문 보도 자료에 나온 흥학관 기사를 살펴봄으로써 숨겨진 독립운동가와 역사 속에 묻힌 흥학관을 알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1914년에 발간된 ‘광주읍지’의 ‘학교’ 편에 보면 “흥학관은 서광산정에 있으며, 최명구가 청년들을 위한 수양회장으로 세운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삼일 만세 운동이 큰 성과 없이 끝난 후 실의에 빠진 광주 전라민들을 위해 1921년 최명구는 흥학관 부지에 200여 평의 새 건물을 지었다. 1924년 최명구가 세상을 떠나자 장남인 최상현이 1942년까지 흥학관을 운영했다. 최상현은 흥학관을 운영하며 민족 계몽 운동에 힘썼고 거액의 빈민 구제 자금과 독립 운동 자금을 기부했다. 또한 익명으로 각 학교에 기부금을 냈고 오방 최흥종이 소개한 손창식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보내주기도 했다.

1921년 10월 2일 동아일보 사회면에는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부에서는 1921년 10월 1일부터 노동 야학을 개시하였는데 장소는 흥학관이오….”라는 기사가 실렸다. 또한 1927년 10월 29일 동아일보 생활·문화면에서는 흥학관 사립 보통학교와 누문리 유치원에서 학용품을 무료로 제공했다는 기사가 담겼다. 당시 기사를 살펴보면 흥학관에는 사립 보통학교와 고등과 강습소, 노동 야학, 여성 야학교 등이 있었다.

학생 독립 운동의 주역 왕재일은 흥학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흥학관 야학에서 공부하여 광주 고등 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에 합격했다고 회고했다. 성진회 회원들을 비롯해 광주 학생 독립 운동의 주역들은 흥학관에서 열린 강연을 듣고 민족 의식을 깨쳤고 애국 애족 정신을 길렀다.

흥학관은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부 사무실, 신간회 광주지부 사무실 그리고 노동 쟁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광주와 전라 일대 청년들이 눈만 뜨면 흥학관에 와서는 독서회니 노동자 권익 보호에 관한 토론회니 하면서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고, 야구 대회다 권투 대회다 하며 몰려와서는 활개를 치고 다니니 일제의 입장에서 흥학관은 눈엣가시와 같은 곳이었다.

이상재, 안재홍 등 항일 지사들이 흥학관에 와서 강연을 할 때면 광주 전라 일대에서 청년들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이럴 땐 어김없이 행사 전에 정·사복 차림의 일인 경찰들이 들이닥쳐 흥학관 앞을 꽉 메우며 감시하곤 했다. 강연 내용에서 조금이라도 독립 운동에 관한 강연이 나오면 임석 경관은 곧바로 “강연 중지!” 하고 외치며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러면 강연은 그것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고 ‘독립’ 운운했다는 죄목으로 현장에서 끌려가는 연사도 있었다고 독립운동가 최한영은 회고했다.

일본 당국이 흥학관의 일을 사사건건 간섭을 하자 최상현은 일제의 말은 귀담아 듣지 않겠다는 뜻으로 호를 일농(一聾)이라 지었다. 일본 당국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흥학관이 민족 계몽 운동을 계속해 나가자 일제는 최상현에게 핍박을 가했다.

최상현이 일제에 비협조적이자 급기야는 1944년 그의 둘째 아들 최정엽(1923~1994)을 학도병으로 끌고 갔다. 이 때문에 마음의 병을 얻은 최상현은 해방되기 몇 달 전에 세상을 뜨고 만다. 2006년 일제 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통지서를 최정엽의 장남 최준성에게 보냈다. ‘최정엽은 1944년 경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되어 육군 특설 수상 근무 제122 중대에서 복무하고 귀환한 사실이 인정됨.’

폭풍처럼 몰아치는 제국주의의 횡포 속에서도 시대의 등불을 꿋꿋이 지켜나갔던 흥학관. 민족 계몽 운동과 학생 독립 운동의 요람으로서 정신적 기둥이 되었던 흥학관 정신이 오늘날에도 이어져 민족 화합과 부흥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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