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호 영암 신북성당 주임 신부] 오월을 보내고, 다시 오월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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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뛰놀던 철부지였지만, 나는 1980년 5월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그 후, 청소년 시기에 찾아오는 내·외적인 성장과 호기심은 5월이 되면 눈물과 분노로 바뀌어 갔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전남대학교 후문을 지나야 갈 수 있었다. 그런데 5월이 되면 버스는 대학교 후문을 지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후문을 중심으로 교정 안에는 많은 대학생들이, 그리고 도로변에는 전투 경찰들이 대치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기에 등하교를 위해 항상 치약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왜냐하면 최루탄을 엄청나게 뿌려댔고, 그래서 눈물 콧물이 쏟아졌는데 마스크만으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해 5월, 여지없이 그곳은 전투와 같은 광경이 벌어졌다. 그런데 전투 경찰이 후퇴하다 넘어진 한 대학생을 군화발로 짓밟는 것을 보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우리의 형이었고, 우리의 누이였으며, 우리의 가족이었다. 왜 그렇게 짓밟아야만 했을까? 위협이 느껴지는 제복을 입고 군화를 신은 경찰에 무참히 짓밟히는 현장을 보고서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나의 오른 손에 깨진 보도 블럭 돌을 들었고, 전투 경찰들을 향해 힘차게 던질 뿐이었다.
다시 80년 5월을 기억해본다. 한 시민군이 나와 골목 친구들에게 박카스 한 병을 주었다. 내 기억으로 우리는 박카스 병뚜껑으로 조금씩 따라 나눠 마셨다. 당시 꽤 번화했던 서방 시장에 사람들이 모여 시민군들에게 나누어 줄 주먹밥 등의 먹거리를 만들었고, 빨간 플라스틱 한 바가지의 물을 단 숨에 삼켜 버렸던 목마른 시민군 형도 기억난다. 그 형을 바라보시던 한 어르신이 “야 이놈아! 체하겄다. 천천히 묵으라 잉” 하시니, 한 바탕 다들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러나 이내 배를 채운 시민군 형들이 하나 둘씩 트럭에 탔고, 시장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아무 말을 못했던 게 기억난다.
민주화를 외치다 열사가 된 이들은 광주 망월동 묘역으로 향하였고, 그 행렬은 항상 서방 시장을 지났다. 어느 해 5월, 나는 가게에서 아버지를 돕던 중이었다. 별안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전투 경찰들이 시장 앞을 지나는 열사와 함께 한 행렬을 흩어버렸다. 가게 앞까지 최루탄이 터지고 난리였다. 광주 지리를 몰랐던 타 지역 대학생들이 도망가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전투 경찰들에게 두들겨 맞고 잡혀갔다. 그런데 한 대학생이 갑자기 우리 가게에 들어왔고, 전투 경찰도 뒤따라 들어왔다. 그때 아버지의 말이 정확하게 기억난다. “우리 아들이요. 우리 아들!”
아버지와 TV를 보다가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다. 우리 광주의 희망이라 생각했던 고(故)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이다. 이제는 더 이상 5월이 되면 가방에 치약을 넣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나도 모르게 돌을 손에 쥐거나 던지지 않아도 되며, 또한 우리의 형, 누나, 가족들이 도망치거나 두들겨 맞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의 5월은 끝나지 않은 것 같다. 그 거만한 전두환 씨는 절대 머리를 숙이지 않고, 무언가를 묻고 싶어 그의 팔을 잡으니 “이거 왜 이래”라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마 그는 끝내 머리를 숙이지 않을 것 같다. 우리 안에 있는 멍우리 같은 슬픔과 고통이 깨끗이 씻기는 날은 아직도 멀었단 말인가?
이제 내가 아는 경상도 사제들도 광주 민주화운동을 광주 사태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은 광주의 희생 때문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39주년의 5월을 보내고 있다. 내년은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온 몸으로 지켜냈던 광주 민주화운동이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나는 내년 5월에 내 조카들에게 박카스를 주고 싶다.
나는 내년 5월에 빨간 플라스틱 한 바가지 물을 단숨에 삼켜버리고 싶다. 그리고 그날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우리 형제요, 우리 누이며, 우리 가족입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예수가 우리에게 성령과 평화를 주시는 그 마음으로 그렇게 말하고 싶다.
민주화를 외치다 열사가 된 이들은 광주 망월동 묘역으로 향하였고, 그 행렬은 항상 서방 시장을 지났다. 어느 해 5월, 나는 가게에서 아버지를 돕던 중이었다. 별안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전투 경찰들이 시장 앞을 지나는 열사와 함께 한 행렬을 흩어버렸다. 가게 앞까지 최루탄이 터지고 난리였다. 광주 지리를 몰랐던 타 지역 대학생들이 도망가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전투 경찰들에게 두들겨 맞고 잡혀갔다. 그런데 한 대학생이 갑자기 우리 가게에 들어왔고, 전투 경찰도 뒤따라 들어왔다. 그때 아버지의 말이 정확하게 기억난다. “우리 아들이요. 우리 아들!”
아버지와 TV를 보다가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다. 우리 광주의 희망이라 생각했던 고(故)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이다. 이제는 더 이상 5월이 되면 가방에 치약을 넣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나도 모르게 돌을 손에 쥐거나 던지지 않아도 되며, 또한 우리의 형, 누나, 가족들이 도망치거나 두들겨 맞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의 5월은 끝나지 않은 것 같다. 그 거만한 전두환 씨는 절대 머리를 숙이지 않고, 무언가를 묻고 싶어 그의 팔을 잡으니 “이거 왜 이래”라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마 그는 끝내 머리를 숙이지 않을 것 같다. 우리 안에 있는 멍우리 같은 슬픔과 고통이 깨끗이 씻기는 날은 아직도 멀었단 말인가?
이제 내가 아는 경상도 사제들도 광주 민주화운동을 광주 사태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은 광주의 희생 때문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39주년의 5월을 보내고 있다. 내년은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온 몸으로 지켜냈던 광주 민주화운동이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나는 내년 5월에 내 조카들에게 박카스를 주고 싶다.
나는 내년 5월에 빨간 플라스틱 한 바가지 물을 단숨에 삼켜버리고 싶다. 그리고 그날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우리 형제요, 우리 누이며, 우리 가족입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예수가 우리에게 성령과 평화를 주시는 그 마음으로 그렇게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