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태고와 광주
올가 토카르축 ‘태고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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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은 그동안 흔히 접할 수 없었던 폴란드 소설이다. 저자인 올가 토카르축은 ‘방랑자들’이라는 작품으로 2018년 맨부커상(인터내셔널 부분)을 수상한 작가다.(우리나라 작가로는 소설가 한강이 2016년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바 있다.) 상의 후광이 아니더라도 올가 토카르축은 폴란드의 대표적 소설가로서,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동시에 받아 왔다.
폴란드가 아니라 독일이나 프랑스였다면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하는 시기는 훨씬 앞당겨졌을 테고, 영국이나 미국의 소설이었다면 그보다도 빨랐을 것이다. ‘태고의 시간들’로 시작하여 앞으로 많은 작품의 번역 출간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니, 폴란드 문학의 정수를 만끽하고 싶은 독자들은 기대해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 독자들이라면 먼저 ‘태고의 시간들’을 읽기를 추천한다.
소설의 주된 공간은 ‘태고’라는 작은 마을이다. 폴란드 발음으로는 ‘라파우’이나 번역자는 소설에서 언급되는 다른 마을, 도시, 혹은 고유명사들과는 달리 라파우를 태고(太古)라는 말로 옮겨 싣는다. 라파우라는 지명은 폴란드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그 뜻은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는 장소라고 한다. 시공을 초월하는 상징적인 단어이니, 태고라고 하는 게 소설의 이해에 더 도움이 될 성싶다.
소설에 빠져 읽다 보면, 태고라는 발음이 폴란드의 어느 마을의 이름처럼 심지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도 근대 이전의 전원적 삶이었던 태고가 외부적 요인에 의해 근대화를 맞이하고,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죽음이 깃든 마을이 되고, 또한 끈질긴 생명력으로 삶을 지속하는 이들의 터전이 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현실과 멀지 않은 곳에 태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고의 시간들’은 1914년 러시아군에 징집되어 가는 미하우의 모습으로 시작해 그의 외손녀와 그의 사위가 재회하는 1990년대의 어느 날까지의 시간을 그린다. 그 시기에 폴란드(태고)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자국민을 다른 나라의 병사로 보내야 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치열한 전장이 되어 수많은 희생자가 묻힌 곳이 되었다. 그때 그곳에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났다. 전쟁 후에는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어 사유재산이 억압적인 방식으로 국유화가 되었으며 냉전 체재가 와해되며 노조 중심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작가는 폴란드에서 실제로 일어난 현대사의 격동을 태고에 살았던 거의 모든 존재를 주인공으로 하여 엮어 나간다. 거대한 역사의 한복판을 그리는 게 아니라, 작디작은 인간의 부분과 부분을 환상적이고도 우화적으로 표현하여 종래 그것의 역사를 기록한다. ‘태고의 시간들’은 소수자가 기록의 주인이 되고, 그럼으로써 소설은 인간의 본질에 가까워진다.
소설을 읽는 내내 ‘태고’에서 그날의 ‘광주’와 현대사 안의 ‘호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낙오되었던 이들이 있고, 거기에 적응하려 애쓰다 실패한 사람들이 있다. 전쟁에 내몰린 청년이 있다. 가혹하게 희생된 양민이 있다. 무엇보다 광주에는 오월이 있다. 국경을 지켜야 할 무장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있고, 운 좋게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이토록 사무친 굴곡 속에서도 광주는 그리고 호남은 사람을 품고 시간과 공간을 담아 지금 여기에 서 있다. 올가 토카르축은 수차례 밝혀진 실체적 진실과 긴 시간 논의되고 합의된 반성 그리고 반성을 받아들이는 시민사회의 상식에 소설가로서의 상상력을 더해 태고라는 소설적 진실을 창조했다.
그런데 광주는, 호남은, 지금 무엇으로 창조될 수 있는가. 지금 광주의 오월에 상상력을 덧붙인 소설적 진실이 가당한 이야기인가? 희생된 시민들의 단축된 삶을 거름 삼아 마련된 민주주의 과실은 지금 어디로 낙과하고 있는가. 한때 울창했던 태고의 과수원은 나치 군대에 의해 짓밟혀 돌무더기가 되었다. 그 장면까지도 폴란드의 소설가는 참혹한 아름다움으로, 미적으로 표현한다.
유공자 공개니, 북한군 개입이니 하는 ‘대놓고 작정한 듯한 무식함’이 스피커를 타는 한, 광주는 아직 미적인 세계로 나아가기 어렵다. 그리하여 이곳은 태고가 될 수 없다. 태고가 되어 갈 뿐이다.
<시인>
소설의 주된 공간은 ‘태고’라는 작은 마을이다. 폴란드 발음으로는 ‘라파우’이나 번역자는 소설에서 언급되는 다른 마을, 도시, 혹은 고유명사들과는 달리 라파우를 태고(太古)라는 말로 옮겨 싣는다. 라파우라는 지명은 폴란드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그 뜻은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는 장소라고 한다. 시공을 초월하는 상징적인 단어이니, 태고라고 하는 게 소설의 이해에 더 도움이 될 성싶다.
‘태고의 시간들’은 1914년 러시아군에 징집되어 가는 미하우의 모습으로 시작해 그의 외손녀와 그의 사위가 재회하는 1990년대의 어느 날까지의 시간을 그린다. 그 시기에 폴란드(태고)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자국민을 다른 나라의 병사로 보내야 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치열한 전장이 되어 수많은 희생자가 묻힌 곳이 되었다. 그때 그곳에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났다. 전쟁 후에는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어 사유재산이 억압적인 방식으로 국유화가 되었으며 냉전 체재가 와해되며 노조 중심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작가는 폴란드에서 실제로 일어난 현대사의 격동을 태고에 살았던 거의 모든 존재를 주인공으로 하여 엮어 나간다. 거대한 역사의 한복판을 그리는 게 아니라, 작디작은 인간의 부분과 부분을 환상적이고도 우화적으로 표현하여 종래 그것의 역사를 기록한다. ‘태고의 시간들’은 소수자가 기록의 주인이 되고, 그럼으로써 소설은 인간의 본질에 가까워진다.
소설을 읽는 내내 ‘태고’에서 그날의 ‘광주’와 현대사 안의 ‘호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낙오되었던 이들이 있고, 거기에 적응하려 애쓰다 실패한 사람들이 있다. 전쟁에 내몰린 청년이 있다. 가혹하게 희생된 양민이 있다. 무엇보다 광주에는 오월이 있다. 국경을 지켜야 할 무장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있고, 운 좋게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이토록 사무친 굴곡 속에서도 광주는 그리고 호남은 사람을 품고 시간과 공간을 담아 지금 여기에 서 있다. 올가 토카르축은 수차례 밝혀진 실체적 진실과 긴 시간 논의되고 합의된 반성 그리고 반성을 받아들이는 시민사회의 상식에 소설가로서의 상상력을 더해 태고라는 소설적 진실을 창조했다.
그런데 광주는, 호남은, 지금 무엇으로 창조될 수 있는가. 지금 광주의 오월에 상상력을 덧붙인 소설적 진실이 가당한 이야기인가? 희생된 시민들의 단축된 삶을 거름 삼아 마련된 민주주의 과실은 지금 어디로 낙과하고 있는가. 한때 울창했던 태고의 과수원은 나치 군대에 의해 짓밟혀 돌무더기가 되었다. 그 장면까지도 폴란드의 소설가는 참혹한 아름다움으로, 미적으로 표현한다.
유공자 공개니, 북한군 개입이니 하는 ‘대놓고 작정한 듯한 무식함’이 스피커를 타는 한, 광주는 아직 미적인 세계로 나아가기 어렵다. 그리하여 이곳은 태고가 될 수 없다. 태고가 되어 갈 뿐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