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순태 소설가]‘광주다운’ 저널리즘 실천을 - 광주일보 창사 67주년을 축하하며
2019년 04월 19일(금) 00:00
광주일보 창사 67주년을 축하한다. 광주일보는 1950년 6·25전쟁 직후에 창간한 전남일보에 뿌리를 내리고, 80년 5월 광주항쟁 배경과 함께 탄생된, 태생적으로 비극적 역사성을 안고 있다. 이처럼 광주일보는 아픈 역사 속에서 지역민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희망을 노래해 왔다. 6·25 직후 절망과 폐허 속에서도 지역 발전을 견인해 왔고 5·18 광주항쟁을 통해서는 피 흘린 터전 위에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해 노력해 왔다. 남북 분단으로 인한 이념적 대결과 엄혹했던 군사 독재의 역사적 위기 속에서도 광주일보를 비롯한 지역 언론인들은 때로는 절망하기도 했지만, 지사적 기자 정신으로 정의를 바로 세우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투쟁해 왔다.

80년 5월 광주는 공포와 분노와 눈물의 외딴 섬이었다. 5월20일자부터 6월 1일까지 13일간 신문을 발행하지 못한 치욕 속에서도 기자들은 날마다 전원 출근하여 취재에 임했다. 당시 전남매일 편집부국장이었던 필자 또한 5·18영령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역사의 증인이 되기 위해 몸부림쳤던 기억이 새롭다. 1980년 5월 18일과 19일의 폭력 진압을 지켜본 기자들은 공수부대의 만행을 보도하지 않으면 제작을 거부하겠다고 했다. 편집국 간부들은 일단 이틀 동안 취재 내용을 기사화하도록 했다. 비록 검열 때문에 신문을 발행할 수 없더라도 광주에서 있었던 기록만은 역사로 남겨야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이날 광고도 없애고 조판이 완료된 1면 헤드라인은 ‘光州全域 공포… 진압군 무차별 亂打’였다. 18일과 19일에 일어났던 폭력 진압의 내용을 모두 실은 20일자 신문은 조판만 되었을 뿐 발행되지 못했다. 기자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과 함께 집단 사표를 쓰고 전면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들이 개 끌려가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년 5월20일 전남매일 기자 일동”

21일 정오를 알리는 애국가와 함께 계엄군의 총부리가 시민들을 향하고 총탄이 발사될 때까지 기자들은 금남로 도청 앞 광장에 있었다. 이때부터 공수대원들은 눈에 보이는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아댔다. 공수대는 21일 5시30분 도청을 철수했다. 21일 5시30분부터 27일 공수대가 광주에 다시 진입하기까지 일주일 동안 시민들은 도청 앞 광장으로 모였고, 기자들은 시신 발굴 현장과 피해 상황 등 취재에 임했다. 그리고 27일 새벽 나는 계엄사로부터 출근하여 정상적으로 신문을 제작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사장부터 차례대로 전화를 했는데 모두 부재중이어서 결국 내가 받았다고 했다. 나는 공무국장과 부장들에게 전화하여 어떤 경우에도 출근해서 신문을 제작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고 광주를 탈출했다.

계엄사에서 6월2일까지 신문을 제작하지 않으면 발행을 취소하겠다는 통보가 왔다. 기자들은 계엄사 발표 내용으로는 신문을 제작하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는 6월2일 아침 제작 회의에서 창간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상징적인 신문을 제작하자고 했다. 1면에 무등산 사진과 광주 시민의 아픔을 내용으로 쓴 시를, 사회면에는 도청 앞 광장의 분수대와 시민들의 표정을 스케치 형식으로 싣자고 했다.

나는 서둘러 당시 전남고 교사였던 김준태 시인한테 전화로 시를 청탁했고 김준태 시인은 1시간 반 후에 120행의 장시를 써 왔다. 검열관이 80행에 붉은 볼펜으로 ‘삭제’를 표시했고 나머지 40행 중에서도 절반가량에 ‘재고 요망’ 표시를 했다. 하지만 결국 40행을 그대로 살려 발행했다. 계획대로 1면에 광주 시가지를 품은 무등산 사진과 함께 ‘아아 光州여 우리나라의 十字架여’라는 김준태 시인의 시를 싣고, 옆에 ‘光州事態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검정 컷을 물렸다. 그리고 사회면에는 분수대 사진과 같이 ‘광주는 영원하다’라는 제목과 ‘눈물과 피로 범벅됐던 光州의 5월, 80萬 市民의 가슴마다에 쓰라림’이라는 부제를 단, 참담하고 눈물겨운 광주 분위기를 실었다. 이날 시민들이 신문을 사기 위해 신문사 앞에 장사진을 이루었으며 종일 윤전기를 돌렸다. 며칠 후 김준태 시인은 정보부에 붙잡혀 갔고 나는 한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곧 퇴직당하고 말았다.

당시 광주일보의 또 다른 전신인 전남일보 또한 신문 제작 거부를 통해 군부 독재에 항거했다. 많은 신문들이 시민군을 폭도로 모는 당국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쓰고 있을 때 광주일보는 결연히 붓을 놓음으로써 저항한 것이다. 옛 전남일보와 옛 전남매일신문은 1980년 12월 광주일보로 통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며칠 후면 어김없이 역사의 엄숙성과 함께 5월이 오고, 우리는 광주민주화운동 39주년을 맞는다. 다시 5월을 맞으며, 창사 67주년을 계기로 광주일보에 몇 가지 당부하고자 한다. 먼저 피와 눈물로 일구어 낸 5·18정신을 훼손하고 역사를 왜곡하려는 일부 몰지각한 세력들에 대해 과감하게 대응하기를 바란다. ‘광주 정신’은 광주의 희망이며 대한민국의 꿈이다. 빛나는 광주 정신을 전국화·세계화하기 위해서 체계적으로 이념화하는 일에 광주일보가 앞장서야 할 때이다.

그리고 지금은 남북 평화 시대를 정착시키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보여야 한다. 정치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극단적 대립으로 국가적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는 이때, 국민 통합을 위해 보다 선명한 정론을 펼치기 바란다. 또한 지방 자치 시대를 완성시키기 위해 지자체 기관에 대한 감시 기능을 철저히 하면서 지역 발전을 선도할 수 있도록 창의적인 역량을 보여 주기를 바란다. 특히 민주 성지 광주에서 발행되는 대표적 신문답게 ‘광주다운’ 저널리즘을 실천해 주기 바란다. 이 땅에 하나뿐인 광주의 희망, 광주일보여 힘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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