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처음처럼’
2019년 01월 09일(수) 00:00
전시장에 들어서자 투박한 장발에 깊게 패인 이마주름의 ‘자화상’이 발길을 붙든다. 순간 세월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가슴 한켠이 먹먹해진다. 굵고 단순한 필치에 담긴 얼굴은 가난한 농부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 어디로 가는가?’. 처연한 표정의 ‘자화상’과 함께 내걸린 작가 노트가 가슴에 와 박힌다.

최근 광주시립미술관의 석현 (石峴) 박은용(1944~2008) 전시회에 다녀왔다. ‘검은 고독, 푸른 영혼’이라는 테마로 열린 전시는 ‘고독한 농부화가’로 불렸던 그의 10주기를 맞아 기획된 대규모 회고전이다. 평생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정신분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2008년 작업실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필자가 유독 ‘자화상’에 마음을 빼앗긴 건 지난 2001년 나인갤러리에서 본 그의 모습과 오버랩 됐기 때문이다. 자신의 초대전이었지만 그는 화려한 개막식의 주인공과는 거리가 먼, 왠지 쓸쓸해 보였다. ‘그날’ 이후 그를 본 적이 없어 내가 기억하는 화가의 마지막 모습은 ‘자화상’에 머물러 있다.

전시장을 나오는 길, 몇해 전 제주 이중섭 미술관에서 마주한 고 이중섭 화백의 ‘연필로 그린 자화상’이 스쳐 지나갔다. 빛바랜 종이에 연필로 그린 자화상은 이 화백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자신이 미쳤다는 세간의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치열한 내적 의식과 꼼꼼한 필치로 그린 작품이다. 일본 유학시절 만난 일본인 여성 마사코와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지만 해방이후 아내와 두 아들이 일본으로 돌아가자 극심한 상실감과 빈곤, 그리움으로 마음의 병을 얻게 됐다. 당시 거장의 위엄에 압도된 듯 쉽게 그림 앞을 떠나지 못한 관람객들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처럼 화가들의 ‘자화상’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타인에게 쉽게 꺼내지 못한 고백을 자신의 얼굴에 담아 슬픔을 직시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진정한 사색에 이른다. 하지만 자신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그림을 그린다는 건 실제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스스로를 응시하는 동안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현재의 겉모습 뿐만 아니라 지나온 삶의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기 때문이다. 수많은 화가들이 자신의 모습을 캔버스에 옮긴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기해년 새해가 시작됐다. ‘40살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지라’고 했건만 진지하게 스스로의 내면과 마주한 적이 있었는지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바라건대, 올해는 어떤 얼굴로 한 해를 보낼지 한번쯤 되돌아 보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신영복의 ‘처음처럼’ 중에서) <제작국장·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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