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산길
2018년 12월 28일(금) 00:00
산에 난 길이 ‘산길’이다.

골짜기나 계곡을 따라 난 길은 의지를 시험하게 한다. 골짜기 길은 대개가 능선에 가려 그늘지고, 가파른 경우가 많다. 산 위에서 내려오는 물은 그 산에서 제일 빠른 길을 택하기 때문이다. 또 물이 주변을 쓸고 내려가기 때문에 바위가 많다. 골짜기 길은 짧은 시간에 산에 오를 수 있게 해준다. 반면 그 길은 여유 있게 볼 수 있는 경치도 없고 그늘져서 춥다. 무엇보다 길이 가팔라서 무척 힘들다.

행여나 마음이 보이지도 않는 저 꼭대기에 가버리면 전의를 상실하여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눈 닿는 곳은 모두 바위 아니면 숲. 어디가 어딘지 도통 가늠할 수 없다. ‘여기는 어디쯤이지? 정상은 언제쯤이나 나오지?’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꽉 채우면서 가뜩이나 힘든 심신을 더 힘들게 한다.

골짜기 길을 갈 때는 마음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잘 다스려야 한다. 그저 눈은 한 발자욱 앞 발 디딜 곳을 도장 찍듯 내려다 보고, 귀로는 자신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오르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다다른다. 힘들어 할 겨를이 없다. 마음을 온통 산을 오르는 행위에 집중하면 당연히 오르는 동안은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힘들지 않다. 허벅지 근육 부근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통증은 말 그대로 통증일 뿐이다. 통증과 힘들다는 느낌은 별개이다. 그 통증에 마음을 집중해 보면 힘들다는 생각은 거기에 없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물리적 통증이 힘들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무의식적인 연결 고리가 끊어진 것이다.

능선 위로 난 길에는 비록 정상에 오르진 않았으나 정상에 오른 것이나 진배없는 풍광이 있다. 사방천지가 넓게 트여 시야를 가득 채우는 넓디 넓은 하늘이 있다. 하늘 아래에서 제아무리 크고 넓은 것이라도 하늘을 따를 수는 없는 법이다. 아래로 굽이치는 산과 멀리 보이는 인간 문명의 흔적들. 능선 길에서의 걸음은 여유롭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서 ‘세상은 이리도 넓은데…’

다시 눈을 아래로 저 멀리 보이는 사람들의 흔적들을 보면서 ‘세상은 저리도 작은데, 저리도 작은 곳 어디에서 그렇게도 많은 고통과 회한과 번뇌가 나오는 걸일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정상은 한참 멀었다. 아직 반도 채 올라오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아래를 내려다 보면 분명히 상당히 많이 올라 온 것 같은데 금방 갈 것 같은 정상은 달아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전히 멀리 있다. 멋진 풍광에 대한 기대 만큼 풍광을 가린 나무들 때문에 기분은 상하고 애가 닳는다. 게다가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능선길은 사람을 금새 지치게 한다. 어느새 마음은 지치고 덩달아 몸도 더 힘들어 진다. 능선 길은 희로애락으로 점철되어 있다. 기쁨도 슬픔도 즐거움도 두려움도 잠깐 스쳐 지나갈 뿐이다. 욕망에 이끌려 일희일비하는 중생들의 삶을 닮았다.

산허리를 휘감아 가는 길에서는 잔잔한 고독을 느낀다. 산허리에 난 길은 산 정상을 가기 위해 만들어진 길이 아니다. 대개 정상에 도달할 목적으로 산을 오르기 때문에 산허리를 휘감아 가는 길엔 아무래도 인적이 드물다. 그리고 길도 한 명이 겨우 다닐 정도로 좁은 경우가 허다하다. 가끔씩 비스듬히 비추는 햇살에 길가 나뭇가지들이 반짝인다. 길모퉁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오직 나만을 반겨줄 그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설렘에 잔잔한 파문이 인다. 하지만 모퉁이를 돌면 언제나 인적 없는 외로운 길. 심한 오르막이나 내리막도 없이 그저 평탄하기만 한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산에서 살아가는 온갖 것들과 그 위에서 반짝이며 춤추는 햇살들에 멈추게 된다. 가끔 갈래길이 나오기도 한다.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는 고민도 잠시. 인적 없는 한적한 길이 다시 나를 반긴다. 산허리로 난 길은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 청빈한 은둔자의 삶이다.

굳이 작고한 최희준 씨의 노래 가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인생은 나그네길이다. ‘언젠가 좋아지겠지’하는 막연한 기대에 의지하여 무작정 걸어가는 것이 인생길이다. 산길, 찻길, 오솔길, 산책로…. 많은 길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역시 인생길이다. 모든 인생은 길 위에서 시작되어 길 위에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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