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국에서 쓴 편지
2018년 12월 12일(수) 00:00
“전하! 신(臣)이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전하께서는 구중궁궐에 계시므로 왜국의 사정을 접할 기회가 없으시고, 그간 이곳을 다녀간 사신들은 있지만 오가는데 바쁜데다 저들의 감시가 삼엄하여 이곳 사정을 살필 기회가 없으며, 포로로 잡혀왔다 풀려난 난 사람들은 대부분 천인들로 숙맥과 같아서 보고 들은 것이 정확치 않을 것이기 때문에 신이 감히 죄를 무릅쓰고 왜국의 사정을 적어 보내오니 신이 별 볼일 없는 인물이라고 여겨 이 글까지 버리지는 마시고 끝까지 읽고 참고하신다면 적을 막아내고 적을 잡아 심문할 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간양록’ 1599년 4월 10일)』

이 글은 정유재란 시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영광 불갑 출신 수은 강항(睡隱 姜沆) 선생이 왜국의 사정을 기록해 보낸 ‘적중봉소’(敵中封疏)의 첫 대목이다. 당시 31세의 강항은 일본 이예주(오스시)에서 몇 번의 탈출에 실패한 후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그곳 출석사 승려 호인(法印)과 필담을 통해 교유하면서 그의 도움을 받아 남몰래 비밀 정보 보고서인 ‘적중봉소’를 작성했다. 그 내용은 왜국의 정세, 인사 정책, 국방 정책, 축성술, 왜장의 명단과 성향, 왜국 66주도의 지도와 지역별 기후와 풍토 등이 담긴 귀중한 정보였다.

강항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세 부를 등사한 후 반드시 조선의 조정에 보내기로 작정한다. 첫 번째 ‘적중봉소’는 1598년 4월 울산사람 김석복에게 보냈다. 김석복은 원래 권율 장군의 집안 종으로 임진왜란 때에 잡혀와 이예주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풀려 귀국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한 부를 건네주며 조정에 전하도록 했다. 두 번째 ‘적중봉소’는 1년 뒤 교토 후시미(복견성)로 이송되어 있을 때 명나라 차관 왕건공이 서해 근처에서 묵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어렵게 왕건공을 접견한 뒤 몰래 한 부를 보냈다. 세 번째 ‘적중봉소’는 무안사람 신정남이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 한 부를 보냈다.

이렇게 세 번에 걸쳐 보낸 ‘적중봉소’는 결과적으로 명나라 차관 왕건공에게 보낸 것만 1599년 6월에 선조 임금에게 전달되고 나머지 두 건은 전달되지 못했다.

선조임금은 ‘적중봉소’를 받아 보고 크게 기뻐하며 강항의 우국충절을 높이 칭찬한 뒤 대신들과 변방의 장군들에게 돌려 보도록 했다. 7년 전쟁 중 처음으로 왜국의 소상한 정보를 한눈에 알게 된 것이었다.

강항은 이렇게 ‘적중봉소’를 보내는 한편, 2년 8개월의 포로 생활 중 교토에서 왜승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를 만나 주자학을 전수하여 일본 사상계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막부시대 주자학이 통치 이념으로 채택되면서 무사 사회가 문민 사회로 변화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올해는 수은 강항 선생이 서거한지 4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지난달 영광군에서 열린 수은 강항 선생 국제 학술세미나에는 일본 강항연구회 무라까미 쓰네오(村上桓夫) 회장 일행이 참석하여 눈길을 끌었다. 일본인임에도 국적을 떠나 400 년 전의 인물을 우리보다 더 깊이 연구하여 소상히 알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우리의 모습이 되돌아봐졌다. 사실 우린 강항 연구 모임 하나도 없지 않은가?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등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우리가 먼저 연구하고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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