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5·18 ⑩ 옛 도청 진압작전 <하>
2시간30분 살육작전…도청은 피로 물들고 광주는 통곡했다
계엄군, 수류탄·소총 중무장 제압…웃으며 자찬까지
발포명령자·헬기사격 진상규명 조사위 ‘마지막 희망’
계엄군, 수류탄·소총 중무장 제압…웃으며 자찬까지
발포명령자·헬기사격 진상규명 조사위 ‘마지막 희망’
![]() 1980년 5월27일 옛 전남도청을 진압한 후 소준열(오른쪽) 전남북 계엄분소장(소장)과 박준병 20사단장이 웃고 있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
광주항쟁 당시 ‘광주의 심장’이었던 옛 전남도청이 진압되기까지는 불과 2시간 3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 숨졌던 시민군의 정확한 숫자과 소재는 아직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시민군 최후거점이었던 도청 진압이 완료된 후 현장을 방문한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소준열 전 전남북계엄분소장(전투병과교육사령관)의 얼굴에 띤 잔인한 웃음은 광주시민을 적으로 보고 전쟁에서 승전한 개선장군들의 모양새였다.
◇3·7·11공수여단 특공조, 살육작전 전개=특전사령부가 작성한 ‘광주지역소요사태 진압작전’, ‘육군본부 상황일지’ 등에 따르면 계엄군은 1980년 5월27일 자정부터 오전 7시까지 전남도청 일대에서 상무충정작전(진압작전)을 펼쳤다. 3공수여단 11대대는 전남도청, 11공수여단 61대대는 전일빌딩·YWCA·관광호텔을 진압했다. 7공수여단은 광주공원을 담당했다.
육군본부가 작성한 ‘특전사 전투상보’에 따르면 1980년 5월26일 오후 2시 3공수여단 광주도청특공작전 회의에서 11대대장 임수원 중령과 1지역대장 편종식 대위를 비롯한 6개 중대 규모 77명의 특공조가 편성된다.
이들은 개인당 M-16소총 탄환 140발, 방탄조끼를 착용하고, 중대별로 수류탄 3발, 최루탄 2발 등을 휴대한 채 작전에 들어간다. 빛과 폭음으로 적을 일시에 무력화 시키는 섬광탄 10발도 챙겼다.
일반 보병 전투복을 입고 헬리콥터로 27일 새벽 1시40분께 조선대 뒷산에 집결한 3공수여단 특공조는 3시부터 1시간에 걸쳐 도청으로 이동한다. 이동경로는 조대종합운동장~조대부중~조대여고~도내기시장~전남기계공고~노동청~도청 후문이었다.
새벽 4시10분 도청 후문(높이 2.5m)을 넘은 특공조는 3중대·2중대·1중대·특공중대·4중대·11중대 순으로 도청 내부에 진입한다. 교전은 길지 않았다. 새벽 5시15분까지 3공수여단 부대원들은 도청 각 방에 수류탄이나 섬광탄, 가스탄을 넣은 뒤 소총을 난사하는 방식으로 시민군을 제압했다. 산발적인 교전까지 모두 마무리되고 20사단에게 현장을 인계한 시각은 오전 7시30분이었다. 시민군 사살은 4명, 포로는 200여명이었으며, 부대원 2명이 총상을 입었다. ‘분석 및 교훈’에서 3공수여단은 ‘평소 연마한 전술(침투 기술, 사격술) 유감없이 발휘’라고 적시하며 자찬했다.
같은 시각 11공수여단은 전일빌딩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고 있었다. ‘11공수여단 광주소요사태진압작전 전투상보’를 살펴보면 지휘관을 포함한 11공수여단 61대대 4중대 특공대원 37명은 26일 밤 11시15분께 광주 비행장에서 UH-1H 5대를 타고 동구 주남마을로 이동, 27일 새벽 1시30분 중간 집결지점인 조선대학교 뒷산에 도착했다. 61대대는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했던 부대 중 하나다. 특공대원들은 새벽 3시30분께 도보로 이동, 4시께 진입시작, 4시10분께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을 점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육군본부 상황일지’에는 4시30분께 침투해 4시38분에 점령을 완료했다고 적혀있다. 두 기록 사이에는 시간대 차이가 있지만 진압시간은 10분 내외로 일치한다.
전일빌딩에 있었던 시민군 증언과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전일빌딩에는 시민군 13명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중 2명은 생포됐고 나머지 11명은 현재까지 행방불명이다. 11공수여단 전투상보 ‘전과 및 피해상황’에는 전일빌딩, YWCA 등에서 3명을 사살하고 29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전과로 기록하고 있다.
7공수여단은 35대대 11지역대 본부·5중대 38명(장교 5명 포함)을 광주공원으로 투입했다. 27일 새벽 1시 국군통합병원에 집결한 특공대원들은 도보로 이동했다. 이동 당시 시위대와 마주쳐 교전이 벌어져 시위대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체포됐다. 새벽 4시 광주공원에 도착했지만 시위대는 없었다. 이에 대해 7공수여단은 ‘봉쇄시기가 너무 늦어 큰 성과를 올릴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7공수여단은 새벽 5시40분까지 주변 수색을 마치고 20사단에 인계하며 작전을 종료했다.
◇진압작전과 헬기사격=5월27일 진압작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헬기 기총 소사다. 지난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는 5월21일과 27일에 헬기사격이 있었다고 결론내렸다. 다수의 군 전문가들도 진압작전에서 헬기는 기본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5월 27일 새벽 전일빌딩 헬기사격은 옛 전남도청 진압작전에 앞서 거점 확보 및 시민군이 옥상에 설치한 기관총 제거 등의 목적이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27일 새벽 1시부터 4시까지 헬기기총소사 작전을 종료한 뒤 10분 후인 4시 10분부터 3공수여단이 옛 전남도청 진압작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씨와 보급반장 구성주씨의 증언에 따르면 시민군은 헬기 기총소사 하루 전인 5월 26일 전일빌딩 옥상에 경기관총을 설치했으며, 전일빌딩에는 시민군 13명이 있었다. 진압작전에 들어가기 전 건물 안에 은신한 시민군의 저항을 일시에 제압하기 위해 헬기사격을 병행했을 가능성이 큰 대목이다.
전일빌딩 작전에 투입됐던 11공수여단의 한 지휘관도 지난 5월 광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습작전의 기본은 헬기공격으로 적의 사기를 완전히 꺾은 뒤 감행하는 것이다. 건물에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데 반격을 막기 위해서라도 헬기 사격은 당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3공수여단 11대대 소속 지역대장이었던 신순용 전 소령도 “전일빌딩 옥상에 기관총이 설치돼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며 “특공조들이 투입되기 전 헬기 사격으로 기선을 제압하는 것은 침투작전의 기본”이라고 말했었다.
◇학살 뒤엔 잔인한 웃음만=지난 5월9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5·18민주화운동 미공개 영상기록물 상영회’를 열었다. 공개된 영상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소준열 계엄분소장, 박준병 20사단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5월27일 도청이 진압된 직후로 추정되는 영상에서 소준열 분소장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었고 바로 옆에 서 있는 박준병 사단장은 철모와 선글라스를 쓴 채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또 이 영상에는 도청을 찾은 정호용 특전사령관에게 장형태 당시 전남지사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모습도 담겨 있었다. 밝은 표정의 정 사령관과 웃고는 있지만 어딘가 씁쓸한 표정의 장 도지사의 상반된 모습은 당시 5월 광주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광주 진압 공적으로 군인 68명이 훈·포장을, 2개 단체와 군인 7명이 표창을 받았다. 광주시민을 학살했지만 죗값 대신 상을 준 것이다. 정부는 지난 2006년 훈·포장을 취소 한데 이어 지난 7월 표창까지 박탈하며 역사 바로잡기에 나섰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 위원회에 따르면 5·18 기간 동안 민간인 166명, 군인 23명, 경찰 4명 등 모두 193명이 사망했다. 또 광주시가 인정한 5·18행방불명자는 82명이다. 지난 38년 간 꾸준한 조사에도 발포명령자·헬기사격 경위·행방불명자 소재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5월 유가족들은 오는 9월 출범하는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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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숨졌던 시민군의 정확한 숫자과 소재는 아직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시민군 최후거점이었던 도청 진압이 완료된 후 현장을 방문한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소준열 전 전남북계엄분소장(전투병과교육사령관)의 얼굴에 띤 잔인한 웃음은 광주시민을 적으로 보고 전쟁에서 승전한 개선장군들의 모양새였다.
육군본부가 작성한 ‘특전사 전투상보’에 따르면 1980년 5월26일 오후 2시 3공수여단 광주도청특공작전 회의에서 11대대장 임수원 중령과 1지역대장 편종식 대위를 비롯한 6개 중대 규모 77명의 특공조가 편성된다.
일반 보병 전투복을 입고 헬리콥터로 27일 새벽 1시40분께 조선대 뒷산에 집결한 3공수여단 특공조는 3시부터 1시간에 걸쳐 도청으로 이동한다. 이동경로는 조대종합운동장~조대부중~조대여고~도내기시장~전남기계공고~노동청~도청 후문이었다.
![]() 1980년 5월27일 20사단이 탱크를 앞세워 전남도청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
새벽 4시10분 도청 후문(높이 2.5m)을 넘은 특공조는 3중대·2중대·1중대·특공중대·4중대·11중대 순으로 도청 내부에 진입한다. 교전은 길지 않았다. 새벽 5시15분까지 3공수여단 부대원들은 도청 각 방에 수류탄이나 섬광탄, 가스탄을 넣은 뒤 소총을 난사하는 방식으로 시민군을 제압했다. 산발적인 교전까지 모두 마무리되고 20사단에게 현장을 인계한 시각은 오전 7시30분이었다. 시민군 사살은 4명, 포로는 200여명이었으며, 부대원 2명이 총상을 입었다. ‘분석 및 교훈’에서 3공수여단은 ‘평소 연마한 전술(침투 기술, 사격술) 유감없이 발휘’라고 적시하며 자찬했다.
같은 시각 11공수여단은 전일빌딩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고 있었다. ‘11공수여단 광주소요사태진압작전 전투상보’를 살펴보면 지휘관을 포함한 11공수여단 61대대 4중대 특공대원 37명은 26일 밤 11시15분께 광주 비행장에서 UH-1H 5대를 타고 동구 주남마을로 이동, 27일 새벽 1시30분 중간 집결지점인 조선대학교 뒷산에 도착했다. 61대대는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했던 부대 중 하나다. 특공대원들은 새벽 3시30분께 도보로 이동, 4시께 진입시작, 4시10분께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을 점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육군본부 상황일지’에는 4시30분께 침투해 4시38분에 점령을 완료했다고 적혀있다. 두 기록 사이에는 시간대 차이가 있지만 진압시간은 10분 내외로 일치한다.
전일빌딩에 있었던 시민군 증언과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전일빌딩에는 시민군 13명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중 2명은 생포됐고 나머지 11명은 현재까지 행방불명이다. 11공수여단 전투상보 ‘전과 및 피해상황’에는 전일빌딩, YWCA 등에서 3명을 사살하고 29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전과로 기록하고 있다.
7공수여단은 35대대 11지역대 본부·5중대 38명(장교 5명 포함)을 광주공원으로 투입했다. 27일 새벽 1시 국군통합병원에 집결한 특공대원들은 도보로 이동했다. 이동 당시 시위대와 마주쳐 교전이 벌어져 시위대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체포됐다. 새벽 4시 광주공원에 도착했지만 시위대는 없었다. 이에 대해 7공수여단은 ‘봉쇄시기가 너무 늦어 큰 성과를 올릴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7공수여단은 새벽 5시40분까지 주변 수색을 마치고 20사단에 인계하며 작전을 종료했다.
◇진압작전과 헬기사격=5월27일 진압작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헬기 기총 소사다. 지난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는 5월21일과 27일에 헬기사격이 있었다고 결론내렸다. 다수의 군 전문가들도 진압작전에서 헬기는 기본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5월 27일 새벽 전일빌딩 헬기사격은 옛 전남도청 진압작전에 앞서 거점 확보 및 시민군이 옥상에 설치한 기관총 제거 등의 목적이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27일 새벽 1시부터 4시까지 헬기기총소사 작전을 종료한 뒤 10분 후인 4시 10분부터 3공수여단이 옛 전남도청 진압작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씨와 보급반장 구성주씨의 증언에 따르면 시민군은 헬기 기총소사 하루 전인 5월 26일 전일빌딩 옥상에 경기관총을 설치했으며, 전일빌딩에는 시민군 13명이 있었다. 진압작전에 들어가기 전 건물 안에 은신한 시민군의 저항을 일시에 제압하기 위해 헬기사격을 병행했을 가능성이 큰 대목이다.
전일빌딩 작전에 투입됐던 11공수여단의 한 지휘관도 지난 5월 광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습작전의 기본은 헬기공격으로 적의 사기를 완전히 꺾은 뒤 감행하는 것이다. 건물에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데 반격을 막기 위해서라도 헬기 사격은 당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3공수여단 11대대 소속 지역대장이었던 신순용 전 소령도 “전일빌딩 옥상에 기관총이 설치돼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며 “특공조들이 투입되기 전 헬기 사격으로 기선을 제압하는 것은 침투작전의 기본”이라고 말했었다.
◇학살 뒤엔 잔인한 웃음만=지난 5월9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5·18민주화운동 미공개 영상기록물 상영회’를 열었다. 공개된 영상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소준열 계엄분소장, 박준병 20사단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5월27일 도청이 진압된 직후로 추정되는 영상에서 소준열 분소장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었고 바로 옆에 서 있는 박준병 사단장은 철모와 선글라스를 쓴 채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또 이 영상에는 도청을 찾은 정호용 특전사령관에게 장형태 당시 전남지사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모습도 담겨 있었다. 밝은 표정의 정 사령관과 웃고는 있지만 어딘가 씁쓸한 표정의 장 도지사의 상반된 모습은 당시 5월 광주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광주 진압 공적으로 군인 68명이 훈·포장을, 2개 단체와 군인 7명이 표창을 받았다. 광주시민을 학살했지만 죗값 대신 상을 준 것이다. 정부는 지난 2006년 훈·포장을 취소 한데 이어 지난 7월 표창까지 박탈하며 역사 바로잡기에 나섰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 위원회에 따르면 5·18 기간 동안 민간인 166명, 군인 23명, 경찰 4명 등 모두 193명이 사망했다. 또 광주시가 인정한 5·18행방불명자는 82명이다. 지난 38년 간 꾸준한 조사에도 발포명령자·헬기사격 경위·행방불명자 소재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5월 유가족들은 오는 9월 출범하는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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